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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처 Apr 04. 2023

환상수림

1.

좌판의 탄자니아 상인이 말했다

이 슬리퍼는 외진 늪에 사는 악어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감수성이 풍부한 악어의 여린 살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흐린 날엔 축축한 슬픔으로 젖어 들 거라고

나는 즉석에서 흥정을 마치고 악어가죽 슬리퍼를 샀다

1cm씩 굽을 잘라 신을 때마다 삶은 줄어들고

때로는 악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악어가 되었다

한때 인간이 파충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온몸에 딱딱한 비늘이 돋았다

상상의 늪에 살았다

기막힌 사연을 들어줄 한가한 낚시꾼을 기다리며



2.

침대 아래서 덩치 큰 악어가 기어 나왔다

어두운 시간 사이로 흐르는 늪을 따라왔다고 했다

누처럼 가는 팔다리로 강을 건너는 나를 본 적 있다고 했다

나를 물 위로 내려쳤던 놈이라고 했다

내 눈물이란 눈물을 다 들이켜고도 갈증에 시달렸다고 했다

관짝 같은 피아노 뚜껑을 연다

썩은 이빨들이 가지런한 아가리 속에서

누군가 담배를 물고 재즈를 친다

목구멍 너머 심연으로 연기가 퍼져나간다

물결 아래 일렁거리는 그림자

비명이 지나간다



3.

욕실에 스콜이 쏟아진다

거울 속으로 양치식물과 넝쿨들이 펼쳐진다

배수관 아래서 하수를 들이키고 입맛 다시는 소리

타일 아래 악어가 꿈틀거린다

거울 속 뿌옇게 빛나는 왕국

거울 밖으로 악어들이 쏟아진다

집안을 돌아다니다 은밀한 곳에 알을 낳는다



4.

삼삼오오 둘러앉아 악어 고기를 뜯는다

술 취한 낚시꾼이 망각의 늪에서 낚았다고

잡식성이라 맛이 깊다고

홍수에 떠내려온 기억을 찾던 여자는

갈대숲에서 악어의 신부가 되었다고

입 큰 아기를 낳았다고

헛기침을 할 때마다 푸른 잎사귀들이 떨어진다



5.

도끼를 들고 피아노를 내려찍는다

으르렁거리며 날이 깊숙이 박힌다

수련이 핀 늪에서 낚시꾼은 희망을 미끼로 던졌다고 떠벌린다

잃어버린 슬리퍼를 찾아 환상수림을 헤맨다

곳곳에 흩어진 두개골, 떨어져 나간 팔다리

이쑤시개를 물고 나온 사람들이 노래방으로 몰려간다

마이크를 잡고 꼬리를 흔든다

서커스 단장이 악어 턱을 벌리고 머리통을 집어넣는다

톱날이 가득한 장미 굶주린 장미

악어가 악몽을 거슬러 간다

늪의 아가리에서 더 깊은 늪이 쏟아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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