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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Dec 18. 2023

19세기 독일의 대표적 여류 문인 "Hülshoff"

메어스부르크(Meersburg)에서 한 많은 그녀의 삶을 마감합니다.

* 이미 발행했던 글인데, 연재 형태의 브런치 북을 만들다 보니 체계상 필요해서 이곳으로 옮겨 왔습니다(이전 글은 삭제했습니다).


1.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Annette von Droste-Hülshoff), 그녀는 누구인가?


독일의 경우에도 19세기까지는 여성은 대학을 다닐 수도 없었으며, 사회활동에도 많은 제약이 뒤따랐다. 이러한 흐름은 문학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실제로 19세기에 활약한 독일의 여류문인은 오늘 내가 이야기하는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Annette von Droste-Hülshoff, 1797~1848)"를 제외하면 인구에 회자되는 여류 문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Annette von Droste-Hülshoff)라는 이름이 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녀의 풀네임은 놀랍게도 "Baroness Anna Elisabeth Franziska Adolphine Wilhelmine Louise Maria von Droste zu Hülshoff"... 엄청나게 길다. 각설하고,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심리 묘사로 사실주의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높은 윤리성과 격조가 있는 향토시로 유명하다. 독일문학사에서 19세기의 유일한 여성작가로 여겨지고 있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유럽통합 이전의 독일의 20마르크(DM) 짜리 화폐에서, 또 독일의 우표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만 보아도 그녀의 독일 내에서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독문학계에서도 그녀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인데, 보다시피 여러 출판사에서 앞다투어 그녀의 대표작인 '유대인의 너도 밤나무(Die Judenbuche)'를 번역하여 출간하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증좌라고 할 수 있다.


2. 또 한 명의 19세기 독일 여류문인,  베티나 폰 아르님(Bettina von Arnim)


물론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 외에도 19세기에 독일에서 활약했던 여류 문인을 더 찾아볼 수는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베티나 폰 아르님(Bettina von Arnim, 1785~1859) 상당히 필명이 높고, 사진에서 보듯이 유로가 사용되기 이전 독일의 5 마르크(DM) 짜리 지폐에서도 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아, 그녀의 본명 또한(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만큼은 아니지만) Elisabeth Catharina Ludovica Magdalena Brentano로 상당히 길다.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베티나 폰 아르님은 자신이 적극 지지했던 1848년의 독일 혁명이 실패한 후 고향에서 은신하다 1859년 베를린에서 사망하게 된다.

베티나 폰 아르님은 괴테(Johann Wofgang von Goethe, 1749~1832)를 비롯한 당대의 문인이나 베토벤을 비롯한 당대의 음악가들과 많은 편지를 교환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편지 교환의 행적을 작품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역시 "괴테가 한 아이와 나눈 편지들(Goethes Briefwechsel mit einem Kinde, 1835년)"를 들 수 있다. 귄데로데(Die Günderode, 1840년), 클레멘스 브렌타노가 받은 봄의 화환(Clemens Brentanos Frühlingskranz, 1844년) 또한 같은 형식의 작품들로 분류될 수 있다. 아, 클레멘스 브렌타노는 그녀의 오빠이다.


한편 베티나 폰 아르님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에 동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843년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전달한 작품인 "이 책은 왕의 것(Dies Buch gehört dem König)을 출간하기도 했다.



3. 다시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Annette von Droste-Hülshoff) 이야기로 돌아가자.


아네테 폰 드로스테 휠스호프는 독일 북부 뮌스터(Münster) 근교의  휠스호프(Hülshoff)에서 남작의 딸로 태어났는데,  그녀가 태어난 휠스호프성(아래사진 참조)은 물 위에 떠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성으로 유명하디. 이 대문에 지금도 여전히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녀의 초상화를 보게 되면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는데, 이는 그녀의 이러한 탄생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렇게 마냥 평온하기만 했던 그녀의 삶은  아버지와 막내 동생의 급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면서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하는데, 무엇보다 신경쇠약과 발작이 이어지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미 시작해 놓은 소설 '유대인의 너도 밤나무'를 집필했고, 1838년부터는 시집도 출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41년부터는 독문학자로 유명한 그녀의 의형제 라스베르크(Laßberg) 남작의 거주지인 보덴 호수(Bodensee) 가의 메어스부르크(Meersburg)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러다 건강이 상당히 나빠지면서 1844년 9월에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1846년에 자신의 신뢰와 애정을 배반한 쉬킹과 완전히 절교한 후 그렇게도 사랑했던 고향을 떠나 다시 메어스부르크로 다. 그리고 1848년 5월 24일 마침내 언니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4.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가 삶을 마감한 곳, 메어스부르크(Meersburg)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는 메어스부르크(Meersburg)에서 삶을 마감하는데, 이제부터 그녀가 죽음을 맞이한 메어스부르크라는 도시와 그 도시 속에 남아 있는 그녀의 흔적을 쫓아가 보기로 하겠다. 사실 메어스부르크는 웬만큼 독일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리 익숙하지 않은 도시, 아니 마을이다. 메어스부르크의 위치는 독일 남쪽에 있는 어마무시하게 큰 호수인 보덴 호수(Bodensee)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편한데... 우선 아래 사진 속의 짙은 푸른색 부분이 독일, 스위스 (CH), 오스트리아(A) 3개국의 자연적 경계선역할을 하고 있는 보덴 호수이고, 메어스부르크는 이 호수의 중간부근에 있다.  

아래 사진은 호숫가에 있는 마을 메어스부르크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 주고 있는데, 보덴 호수는 거의 바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 사진 중앙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구성(舊城, Altes Schloss)으로, 이곳이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그리고 아래 사진은 신성(新城, Neues Schloss)의 정원에서 바라본 메어스부르크와 보덴 호수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야 하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나는 메어스부르크를 찾을 때까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래 사진 속의 동상과 마주치기 전까지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라는 여류 문인에 대해서는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신성을 둘러보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구성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내 눈에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흉상 하나가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일단 사진 한 장을 찍고 가까이 다가가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라는 이름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도 생소한 이름이어서 별다른 관심이 생기지 않았었다. 그런데 우연찮은 기회에 그녀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글쎄,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와의 운명적 만남을 운운하면 좀 지나친 것이 되려나.

그녀의 동상에서 몇 걸음만 내디디면 바로 구성의 입구인데, 막상 구성 입구에서는 구성 전체의 모습을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다. 허니 구성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멀리 신성 쪽에서 바라보는 것이 좋다. 이렇게 말이다. 사진 상의 오른쪽 하단의  다리가 구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다리 밑은 해자이다.   

메어스부르크의 구성은 아직도 개인이 소유하고 있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성안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입장료(2018년 기준으로 9.5유로, 학생할인을 받아도 8.55유로)를 내고 입장권을 구입하여야 한다. 아래 사진과 같이 입장권이 좀 큰데, 입장권에는 "메어스부르크는 그 기원이 1548년을 넘어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보덴호숫가에서 가장 볼만한 도시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1548년에 이르러서야 무언가 확실한 기록이 있고, 신화스러운 이야기까지 다 고려하면 7세기에 이 도시가 건설되었다... 뭐 이런 이야기이지 아닐까 싶다. 아,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해 보니 지금은 입장료가 무려 12.80유로이다.






이 박물관은 옛날 성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30여 개의 크고 작은 전시실로 나뉘어 있는데, 입장하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먼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계단을 다 오르면 자연스럽게 카페(Burg Cafe)로 이어진다. 은 박물관들이 카페와 기념품삽을 갖고 있지만, 이렇게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에 카페를 먼저 지나도록 되어 있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는데...

카페는 자그마한 야외공간과 널따란 실내로 나뉘어 있는데, 보덴 호수의 분위기를 즐기려면 역시 야외에 자리하는 것이 좋다.

카페를 지나쳐 박물관으로 진입하기 전에 내 눈을 잡아 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창문 아래로 보이는 정원의 비어가르텐(Biergarten: Beer Garden)이다. 물론 전시실을 다 둘러본 이후에 갈 수 있도록 되어 있기는 하지만, 조금은 상업적 냄새가 풍긴다.

박물관의 열어놓은 창문밖으로 녹음이 흐드러진다. 푸른빛도 좋고, 또한 이런 류의 구도를 내 너무나도 좋아하기도 하고 해서 또 한 장의 사진을 남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박물관은 모두 30개의 크고 작은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10번 방의 모습. 문 앞에 17세기 스타일의 침실이라고 써 놓았다.   

특별히 관심을 끌만한 것 없는 고만고만한 전시실을 보아 나가다가 다시 한번 창문밖을 바라보니, 보덴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15번 방. 바로 아테네 폰 드로스테-휠스호프가 죽음을 맞이한 방인데, 방의 입구에 이를 크게 써놓았다(Sterbezimmer ~).

15번 방 전체의 모습인데, 아테네 폰 드로스테-휠스호프는 호수의 반짝이는 불빛이 침대 시트를 비출 때에 이를 '스피겔아이(Spiegelei)'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 스피겔아이는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고 프라이를 한 계란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16번 방으로 가는 문의 좌측 벽에 그녀의 초상화가 있다. 말년의 그녀로 생각되는데, 얼굴에서 무언가 병색이 느껴진다.

이 방의 오른쪽 끝에 보이는 침대. 바로 그녀가 고단했던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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