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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 외롭고 고독한 이유

3장. 우울증과 에너지 - 3

by 어진 식 관점


'나는 어디에 있을까?'


현재 우리가 가진 답은 '뇌에 있다'이다. 그런데 정말로 마음이 뇌만으로 해결되는 것이라면, 뇌에 영양만 잘 공급해 주고 몸만 건강하면 마음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듯이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뇌만으로 마음을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 터무니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나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먼저 왜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앞으로의 길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나'를 찾기 위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려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어떤 식으로 우리의 일상에 스며있는지,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현대인의 우울에 기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우울한 것이 꼭 내 탓만은 아니다.




우리는 컴퓨터가 아니지만, 컴퓨터 처리 과정을 살펴보면 마음의 기능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컴퓨터를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컴퓨터가 우리를 본 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크게 입력, 연산, 출력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판을 누르면 글자에 압력이 가해졌다는 신호가 컴퓨터 안으로 들어간다(입력). 그러면 컴퓨터는 그것을 전기 신호로 변환해 모니터에 전달한다(연산). 그리고 그 결과값이 화면상에 글자로 나타난다(출력).


근대 초기에 자연과학자들이 인간을 보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외부 정보를 감각해서(입력), 생각이라는 처리 과정을 거쳐(연산) 행동으로 표현한다(출력). 그리고 이렇게 보면, 나의 마음이라는 것도 '생각하는 과정'에 있을 것 같다. 입력과 출력은 몸이 담당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저 유명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탄생했다. 입력과 출력은 몸이라는 물질 기계가 하는 일이고, 생각이야말로 신이 주신 영혼이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지금 보기에는 '생각'을 곧바로 신이 주신 영혼에 연결한 것이 지나친 비약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이것도 큰 진보였다. 신의 섭리대로 무조건 순응하며 살라고 가르치던 시대에 '생각을 통해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독립한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근대인들은 사람의 생각만 바꾸어 주면 인간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되리라 여겼다. 어떤 사람이 부도덕하거나 어리석은 것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산 과정에 '선하게'라는 정보를 넣어주면 행동을 교정해 선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계몽하다 보면 언젠가 완전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상에도 닿을것이다. 계몽주의 철학의 토대는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세워 사람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주변을 돌아 보면, 우리가 여전히 그 시대의 사고방식과 관습 속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서 '선하게 살라'고 가르친다. 도덕과 윤리 시간에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면 아이들이 착하게 자랄 것이라 믿는다. 부모도 말로 타이르면 아이의 행동이 교정될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20세기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1900년에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간했다. 이후 이어진 연구를 통해 그는 인간이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적 욕망에 이끌리는 매우 충동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실제로 계몽주의 정신에 따라 백 년 가까이 사람들을 교육했지만, 사람들이 더 선해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회가 강요한 '도덕'에 짓눌려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느라 사람들이 병들고 있었다.


영혼이 신의 선물이고, 그 마음 속에 신이 거하신다면 인간에게 그렇게 어두운 욕망이 힘을 키워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인간은 신의 모습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이 보여주듯이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 남으려 발버둥치는 동물과 다를 바 없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계몽주의 정신은 새로운 시대정신에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20세기 후반 등장한 뇌과학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뇌의 정보처리 과정에 불과함을 밝혔다. 감각기관이 정보를 입력하면 뇌가 연산은 물론 출력까지 담당한다. 인간이 '물질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던 자연과학이 그나마 남아 있던 '마음'마저 떼 버리고 오로지 '물질로서의 인간'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한 신경과학자 에릭 캔들의 말은 이러한 자연과학자들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20세기 생물학이 준 커다란 교훈들 중 하나를 출발점으로 삼는데, 그 교훈은 (데카르트의) 문장이 틀렸다는 것이다. …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어느 모로 보나 충분한 근거에 기초하여 정신의 모든 활동이 우리 몸의 특화된 한 부분, 곧 뇌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문장을 뒤집어 이렇게 재구성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 "나는 뇌를 가졌다. 고로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뇌에서 처리되는 많은 과정을 인식하지 못한다. 심장이 뛰는 것은 내가 실행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 아니라, 뇌가 심장을 뛰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도 알고 보면 뇌의 화학 작용이 일으키는 물리 현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나'로 착각할 뿐이다. '나'가 존재한다는 생각, 나아가 '내가 생각한다'는 생각도 깊이 들여다 보면 뇌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다수의 뇌과학자는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도 알고 보면 '뇌의 작용에 대한 우리의 인식 불능'을 달리 표현한 말일 뿐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는 입출력과 연산이 모두 '몸'에서 이루어진다는 다음과 같은 도식을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공식적인 인간론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20세기를 풍미한 이 현대적 흐름으로 인해, 내가 대학에 다니던 20세기 말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계몽주의가 남긴 위압적 질서를 해체해 개인에게 마음껏 욕망하고 느낄 자유를 돌려 주려는 탈근대화 운동이었다. 그 영향을 받아,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 젊음의 상징이 되었고, 그 메아리가 멀리 대한민국에까지 울려퍼지던 때에 대학을 다니던 나도 '서구적인 것'이 곧 현대적이라는 유행에 따라 마치 개화기의 모던보이들처럼 모든 '전통적 인습과 사고방식'을 거부했다. 나의 대학시절은 한 마디로 '자유와 반항'의 시간이었고, '남과 다른 나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없는 나'라도 열심히 만들어야 했던 몸부림의 계절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과 시행착오를 거친 지금,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침범할 수 없는 가치로 여기는 '다원화' 시대에 살고 있다. 탈근대 철학의 관심사 중 하나는, 타인을 자기 생각에 맞추거나 지배하지 못하도록 그의 '타자성'을 보존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간섭하거나 지적하지도 않는다. '개인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고, 최소한의 법적 제재가 아니면, 때로는 법으로도 그의 '느끼고 생각할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개인은 좋든 싫든 자기만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스스로 정립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고, 그로 인해 타인과의 소통은 더 어려워졌다. 자유를 얻은 대신 개인은 점점 고립되고, 그렇게 고립된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의 망상' 속에서 위안을 얻고 힘을 얻어야 하는 부담을 지며 살아가게 되었다. 타인과 소통할 공동의 기반이 없는 우리는, 하릴없이 맛집 이야기나 나누다가 해소되지 않은 공허함을 안은 채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온다.


나는 우리 시대에 정신적 문제가 늘어가는 것이 이러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근대인이 공동체 질서에 짓눌려 히스테리와 홧병을 겪었다면, 지금 우리는 개인화된 사회에서 각자도생하느라 우울증과 번아웃, 망상과 조현병을 앓고 있다. 특히 빠른 성장을 이루느라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세대에 관계 없이 전 국민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왜 인간은 홀로여도, 함께여도 행복하지 않을까. 대체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이제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처음부터 다시 물어야 할 시간이다.



※ 짧은 요약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우리를 잘못된 해결책으로 이끌어 고통스럽게 한다. 그래서 정신적 고통에 대한 해법도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인용자료

에릭 캔들, 『기억의 비밀』, 해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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