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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킁킁총총 Jun 22. 2024

걷는다. 그냥 또 걷는다.

걸으며 마주친 장소, 순간들

24.06.17(월)

제주도의 월요일은 고요하다. 이 고요하다의 의미는 사실 미화한 것이다. 제주도의 월요일은 쉬는 곳이 참 많았다. 지도에서 무작정 가고 싶은 곳들을 찾다 보면 마주치는 "월요일 휴무"가 나를 멈추게 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월요일은 주말이구나. 이렇게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가고 싶던 브런치 가게는 영업을 하고 있었다. 너무 가보고 싶었던 가게, 가격은 비싼 편이며 음식의 양은 적은 가게이지만 맛은 좋다는 그곳. 어쩌면 나에게 좀 맞는 장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양이 많은 않은 나에게 말이다. 두 개의 메뉴를 시키고 싶었지만 에그인헬 하나만 주문하기로 했다. 오픈 시간부터 자리가 꽉 차있는 가게를 보면 맛은 확실히 보장될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 이유 중에 분명 여사장님으로 보이는 저분도 큰 몫을 하고 계실 것 같았다. 너무 친절하시다. 음식점에 친절은 기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기에 더욱 끌렸던 가게.

메뉴가 나오기까지 40분이라는 시간이 걸렸기에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드디어 내 앞에 짠하고 등장한 메뉴. 비주얼 합격, 냄새 합격 이제 입으로 넣겠습니다. 음식이 입에 들어가고 사라지기까지 단 5분. 내가 과연 숨을 쉬고 먹었을까? 맛있다는 생각만 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맛있었기에 내가 숨을 쉬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맛있었다. 이 한마디만 기억에 남았다.


"사장님, 너무 맛있었어요. 제가 먹으면서 숨을 쉬었는지 모르겠어요."


밝게 웃으시며 바게트빵을 더 챙겨주려고 했는데 너무 빨리 드셨다고 말하는 사장님을 보고 살짝 반할뻔했다. 나는 금사빠가 확실하다. 제주도에 다시 올 이유가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나왔다.

특별한 일정은 없고 비가 내리는 오전. 맞은편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넜다. 카페 옆에 무언가 신기해 보이는 매장이 있기에 주저 없이 들어가 봤다. 오! 코오롱에서 운영하는 리버스매장이었다. 환경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코오롱이 멋있어 보였다. 최근에 산 코오롱 등산화 때문이었을까. 친근감이 느껴지는 매장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만한 물건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3층에서는 무료 네 컷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싫어하지만 익숙해지기 위해 어플도 설치하고 사진을 찍어봤지만 여전히 어색한 순간이었다. 결과물도 처참하다. 이렇게 못 찍어도 괜찮을까 싶은데 그냥 혼자 간직하자. 누구도 보여주지 말자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프릳츠 커피와 콜라보 한 모자와 양말을 손에 들었다. 나의 등산화와 매치했을 때를 상상하며 계산대로 향했다.


"저희가 리버스 매장이다 보니 담아가실 봉투나 종이가방을 따로 드리진 않는데, 혹시 필요하실까요?"


달라고 하면 죄를 짓는 것 같은 생각이 물씬 풍기는 질문이었기에 웃으며 괜찮습니다로 답변을 드렸다. 저 질문에 혹시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좀 더 자연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옆에 카페로 이동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창문을 바라보며 우산을 살까 한참을 고민했다. 사기는 아깝고 안 사기에는 비 맞으면서 다니기가 불편할 것 같고 생각은 점점 많아졌다. 그러다 문득 스타벅스 프리퀀시가 생각났다. 이거다! 당근을 켜서 프리퀀시 구매 글을 올렸다. 몇 개 남지 않았기에 6천 원이면 해결될 것 같았다. (사실 일반 프리퀀시는 좀 많이 남았지만 누나 찬스를 활용하자는 생각으로 미션음료만 구매하기로 생각했지만 말이다.) 프리퀀시를 다 채우고 주변 스타벅스를 찾아갔다. 그런데 비가 점점 잦아들더니 결국 그쳤지 뭐야. 그래도 기왕 모은 거 교환을 하러 갔는데 새로운 사실을 알아버렸다. 당일 교환이 불가능하고 예약을 통한 교환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짐이 늘지 않았으니 다행인 걸로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 기내에 장우산은 반입금지 품목이면 어떻게? 행복회로를 돌리며 다음 장소를 향해 걸었다.


특별한 계획이 없는 오늘, 목적지는 게스트 하우스. 가는 길에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들려 보자는 생각으로 다녔다. 비가 그치고 날은 더워졌지만 아직 구름이 많아 충분히 걸을 수 있는 날씨였다. 그래서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너무 먼 거리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내려서 걷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이호테우 해변에 도착했다. 비구름 덕분에 원하는 사진은 건질 수 없었지만 그 나름의 운치를 담은 사진이기에 덕분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일기떨기 팟캐스트를 들으며 무작정 걷기를 반복했다. 신기하게도 오늘 들은 회차에서는 천선란 작가님이 제주도 이야기를 꺼냈다. 이호테우 해변을 걸으며 듣는 이번 회차가 꽤나 반가운 시간이었다. 오늘도 특별함 한 스푼 획득.

오늘은 파티가 있는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해 놨기에 조금 일찍 숙소로 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북적북적한 파티를 가고 싶진 않았지만 파티 메뉴가 마음에 쏙 들어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뉴는 바로 흑돼지 무한리필과 회. 단돈 25,000원으로 두 가지 메뉴를 먹을 수 있다니. 혼자 여행의 단점이 있다면 메뉴 선택에 약간의 제약이 있다는 것인데 이걸 해결해 주는 완벽한 파티를 거부할 수 없었다. 아, 소주 1병도 포함된 금액이었다. 규모가 큰 게스트 하우스는 아니었기에 부담스럽지 않았기에 더욱 선택하기 어렵지 않았다. 단점이 있다면 좀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뚜벅이가 가기에는 조금 불편하다는 것 정도. 그렇게 버스를 타고 환승을 해서 가능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환승을 하는 버스의 배차 간격이... 40분?! 그냥 앉아서 시간을 버리기에는 아까운 나머지 걷기를 선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걷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 정도쯤이야로 생각했다. 도보 1시간 거리였는데 말이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정말 또 또 걸었다. 언덕길을 걸으며 저 멀리 보이는 바다가 예뻐 보이고 외진 곳이라 차도 많이 다니지 않아 도로 가운데 서서 사진도 찍고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걸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왜 도착하지 않는 걸까. 구름은 점점 걷히고 햇빛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에는 뒷목과 등에 비치는 햇살이 반갑지 않았다. 등이라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 봤다. 그냥 버스를 기다렸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긴 거리일 줄 알았다면. 하지만 걷다가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는 순간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걷기를 잘했다고 바보처럼 긍정적으로 변해버리는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 생각보다 예뻤다. 일단 씻자.

오늘도 2만 보는 걸은 것 같았다.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게 맡겼다. 파티까지 한 시간 반정도가 남았지만 뭔가 하기에는 이따 마실 술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기에 쉼을 선택했다. 자고 싶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기에 그냥 눈을 감고 시간을 보냈다. 파티 시간이 다가오고 노을이 질 것 같은 시간이기에 밖으로 나갔다.


"와, 미쳤다."


너무 예쁜 하늘과 풍경을 보고 와를 몇 번을 외쳤을까. 이렇게 예쁜 풍경을 혼자 보는 게 너무 아쉬워 친구들 단톡방에 영상통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다들 바쁜 월요일을 보내고 있을까. 이 장면을 꼭 보여주고 싶었지만 사진으로 담아 단톡방에 올렸다. 노을이 너무 예뻐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혼자보기 너무 아쉬워서 그랬다고 아쉬움을 털어냈다.

드디어 파티 시작. 고기의 퀄리티가 생각보다 좋았다. 소시지, 양파, 버섯 그리고 고기까지 구성도 알찼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김치가 없었다. 말이 되는 것일까. 대한민국 식탁에 김치가 없다는 게 말이다. 고기를 먹으며 같이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김치가 없어서 물려요. 고기 적게 먹게 하려는 하나의 수작이지 않을까 합니다. 다들 같은 생각인지 격하게 공감을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남자 4명이 모여있는 우리 테이블에는 정적이 자주 흘렀지만 편안했다. 여유롭게 밖을 바라보며 노을도 보고 시답잖은 이야기, 여행 이야기 그냥 흘러가는 데로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는 지루했고 누군가는 여유로웠던 시간이었다. 나는 당연히 후자였다.

고기를 먹고 나니 라면과 회가 등장했다. 아, 미쳤다. 너무 좋다.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옆 테이블 소주 한 병까지 은근슬쩍 먹으며 소주 5병으로 마무리 한 저녁이 꽤 완벽한 시간이었다.

저녁 10시 이대로 자기에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제일 중요한 밤바다를 아직 못 봤기에 더욱 아쉬운 마음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바다까지 걸어가기에는 한 시간, 아까의 기억이 가지 말라고 붙잡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같이 식사하던 형님들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이 택시 타고 가실 의사가 있는지 여쭤봤지만 역시나 거절. 그렇게 혼자 택시를 탈까 고민하던 찰나 2차를 나가려는 다른 테이블 사람들이 보였다. 자리가 남으면 좀 끼어 타고 갈 생각에 물었고 다행히 자리가 남았다. 러키. 택시를 함께 타는 사람 중 나는 건이를 만났다. 건이를 만난 것 역시 우연과 필연 사이 어느 즈음이려나.


택시에서 대화를 나눈 건이는 태백에 사는 스물두 살 삼수생이었다. 입대를 앞둔 건이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짧았던 대화를 통해 건이가 꽤 괜찮아 보였고 건이는 술자리로 나는 바다로 향할 것이기에 아쉬움은 뒤로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바로 옆에 바다가 보였다. 주저함 없이 바다로 향했고 내 옆에 건이가 따라왔다.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을까. 건이는 나와 함께 바다로 가는 것을 택했다. 술집이 아닌.


밤바다를 바라보며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건이의 인생에 훈수를 조금 두었다. 요즘 내가 느끼는 실패했던 내 인생과 멈춰있는 시간 그리고 현재의 내가 하려는 시도들을 서슴없이 말했다. 건이가 날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내 모습을 보니 마치 건이가 아닌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되새기기 위해.

건이도 처음 보는 나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줬다. 본인의 관심사 그리고 방황하고 있는 지금의 순간들에 대해 솔직한 심정을 털어냈다.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는 건이에게 나는 쉽다는 듯 이야기했다.


“둘 다 하면 되지. 지금의 너 나이면 둘 다 할 수 있어. 선택하지 않아도 괜찮아. “


건이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내 말의 뜻을 이해했다는 듯이 밝은 표정으로 그러네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너 나이 때는 물음표가 느낌표 같았어. 물음표가 생긴 순간 실천으로 옮겼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건이를 위한 말이 아닌 나에게 던지는 말 투성이었다.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는 각자의 마음에 살아있을까? 그 시간 밤바다를 바라보며 띠동갑인 우리는 마치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내가 대화하는 순간이었던 것 같았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걸음, 연락처를 물어볼까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순간으로 기억에 남기고 싶었다.


“우리가 다시 볼 순 없겠지만 건이라는 이름을 꽤 오래 기억할 것 같아. 그리고 멀리서 응원할게. 너의 물음표를 잘 좆아가 봐.”


우리의 시원한 여름 밤바다는 앞으로도 마음과 머리에 꽤 오래 간직될 것이다.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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