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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언니 Dec 25. 2023

눈이 오네요

그곳에도 눈이 오겠죠?

 펑펑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눈을 맞으며 나는 웃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다정하게 빛나던 눈빛은 나에게만 향해있고, 온 세상이 하얀색으로 뒤덮였던 그 곳은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 살법 했지만 그 주인공과는 다르게 외롭지 않았다. 아니, 너무도 행복했다. 7살 어린 아이가 바라본 아무도 없는 운동장은 드 넓은 초원 같아 보였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누군가의 방문흔적이란 없었고, 나를 태우기 위해 끌고 온 세발자전거의 바퀴 자국만이 진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운동장 가운데쯤 와서는 장갑 낀 내손을 이끌며 아빠는 나를 자전거 위로 태웠다. 자전거를 밀어주는 아빠의 웃음과 살짝 얼어 굳었을 볼의 느낌은

30년이 넘도록 진하게 여운을 남긴다. 동서남북 이 운동장에 우리만이 유일했던 그 공간에 아빠와 나 단 둘 뿐이었다. 동생들이 깰까 봐 늘 눈치 보던 첫째가 아닌 아빠만의 유일한 딸. 얼마나 놀았는지 어느 타이밍에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는다. 그저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아빠와 함께 했던 그 시간이 겨울이면 잔상처럼 늘 떠오르는 장면이다. 마법 같은 그 시간을 끝으로 그곳에서의 겨울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튼튼한 울타리 안 성 처럼 드 높았던 그곳을 돈에 쫓겨 다음 겨울이 오기전 나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고 사람의 다리만이 보이며 나보다 오래 살았을 바퀴벌레들이 많은 반지하로 이사를 왔다. 더 이상 나는 동화 속 주인공이 될 수 없었고, 아빠의 유일한 딸이 될 수도 없었다. 겨울이면 엄마는 가스레인지에 물을 데워 단층 높은 화장실세숫대야에 부어주었고, 잠잘 때만 보일러를 돌려 부족한 온기를 채워주었다.

 주변엔 너른 초원 같은 공원도 운동장도 없었다. 그저 삐그덕 소리가 나는 낡고 조금 한 놀이터만 있었을 뿐이었다. 눈이 내린 다음날 그때의 그 하얀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싶어 그 놀이터로 향했다. 좁다 하더라도 하얀눈을 만끽할 수만 있다면 너비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북한 눈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상상은 도착과 동시에 허공에 흩뿌려졌다. 언제 뛰어나온 것인지 여러 아이들의 발자국으로 눈과 흙은 한데 섞여 지저분해 보였다.

“….가자.”

 다시는 그 때의 하얀 세상을 볼 수 없겠구나 싶어 씁쓸하게 동생의 손을 잡고 우리의 어두운 반지하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밤 엄마는 눈물을 훔쳤고, 모든 것이 신기루가 되어 나락으로 떨어진 아빠는 취하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나의 겨울은 아니, 우리 다섯 식구의 겨울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었다.


 결국 반지하에서 꾸역꾸역 버티던 서울에서 튕겨 나와 경기도의 산골 마을로 쫓기듯 떠나오게 되었다 어두 컴컴한 큰 터널을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선잠이 들었다 깨어 앞 유리로 보이는 터널이 블랙홀 같은 생각이 들어 두려울 때쯤 다시 밝아지고 또다시 어둠이 찾아오는 게 반지하에 살던 우리 가족의 막막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지막으로 기나긴 터널을 지나자 온 세상이 하얀 바깥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산과 들에 그리고 온마을이 눈으로 덮여 서울에서 볼 수 없던 광경을 보자 눈이 뜨였다.

"옆에 봐봐. 온 세상이 하얗다. 일어나 봐 봐."

엄마에게 안겨 잠든 동생을 깨워 억지로 창밖을 보게 했다.

"으응. 어! 눈이다. 와아! 눈의 여왕 마을인가?"

무표정하게 아니 어쩌면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을지도 모를 지금의 내 나이였던 엄마도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봤다. 엄마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 엄마도 우리가 웃을 때 함께 웃어주었다.


 아빠는 이삿짐의 정리가 얼추 되었을 때 우리 자매를 끌고 윗마을에 인사를 가자며 나섰다.

"저 쪽 새 도로로 가면 빠른데 완만해 보여도 오르막 길이라 미끄러우니까 우리 조금 산을 타 보자."

 야트막한 산이지만 제법 가파르던 곳이라 점점 힘들어졌다. 이제는 그만 집에 가고 싶어질 때쯤 다행히도 우리는 마을에 도착했고, 막걸리로 서로의 통성명을 시작하는 어른들 뒤로 아이들은 원래 알았다는 듯이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며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 문득 소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그 집 딸은 우리를 우사로 데려가 소를 보여주고 먹이를 주게 했다. 얼마나 놀았을까? 배추를 기르기 위해 밭에 뿌렸었다는 비워져 있는 비료 포대 앞으로 모이게 되었다.

"너희 썰매 탈래?"

"응? 여기 썰매장이 있어?"

"그럼. 썰매장이 있지. 요 앞에 도로에 차가 안 다니거든. 내가 썰매 만들어줄게. 아저씨, 아저씨 집에 놀러 가도 돼요?"

"어? 그래, 그래. 진숙이가 동생들 잘 데리고 가줘."

 이미 취기가 오른 아빠는 12살 언니에게 우리를 부탁하고는 뒤돌아 비워진 잔읗 다시 채우며 허허 웃고 있었다.

"비료포대에 짚을 아주 푹신하게 채워! 묶이지 않아도 되니까 알았지?"

"으응. 이렇게?"

"그리고 이 장갑을 껴."

어른들의 목장갑을 손에 껴보니 마치 허수아비 같은 내손에 웃음이 났고, 우리는 또 다 같이 웃었다.

"자, 이제 나를 따라와!!"

 썰매장의 짧은 코스는 비교도 안 되는 그런 길이의 내리막길을 비료포대 병정 4명은 일렬로 맞춰 차례로 빠른 스피드를 내며 마을도 없이 혼자 자리를 지키는 우리의 새 집에 도착했다.  빨갛게 얼은 볼을 치켜올리며 네 명은 신나게 웃었고, 큰 산은 우리의 웃음을 메아리로 돌려주었다.  눈치 보던 10살 서울의 나는 다시 겨울을 기다려지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곳생활이 잃어버렸던 행복을 되찾게 해 주었다. 라면 기가 막힌 해피엔딩이었겠지만 이 추억을 벗 삼아 그 오지 같은 산지 생활을 버텨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사는 이곳은 10년 동안 눈이 쌓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제 해가 없는 틈에 눈이 내렸는지 눈이 쌓였는지 제법 아파트 단지를 하얀 눈이 뒤덮고 있었다. 쌓인 눈을 처음 보는 아이들은 대충 옷을 입고 뛰어나가 눈을 굴려뎄다. 처음이라 어설픈 눈사람을 보니 비료포대를 타던 내가 생각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는 나의 부모님과도 안부를 묻고, 전화를 끊고 나니 진숙이 언니가 생각이 난다.


"언니, 잘 있지? 그곳에도 눈이 참 많이 왔겠다. 그 때, 참 고마웠어. 덕분에 그 추억으로 나는 지금을 살아. 우리 잘 살자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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