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은 오후. 내가 나갈 채비를 하면 회류는 자다 말고 뭔가 다른 분위기를 눈치채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는 갑자기 다 잤다는 듯 길게 호랑이 자세로 기지개를 켜더니 나를 따를 심산이다. 지금까지 자는 척한 거냐.. 현관문을 열자마자 튀어나가서는 문 앞에서 기다린다. 하지만 여전히 같이 갈 생각이 없다는 듯 딴청을 피운다. 그러다가 대문을 벗어나 완전히 내가 길가로 나오면 "같이 가" 하는 듯 내달려온다. 그리고는 내 주변에 머무른다. 내가 쳐다보면 다른 볼일이 있다는 듯 또 주변을 탐색하고 내게 무신경이다. 그러다가 또 내가 움직이면 아닌 척 슬금슬금 따라온다. 무관심한 척하지만 속에는 더없는 관심과 애정을 숨긴 고양이.
목줄이나 배변처리도구가 필요 없는 고양이와의 산책은 홀가분하다. 고양이는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면 다시 원래의 곳을 찾아오기 어려울 것 같아 항상 같은 곳만 우리는 다닌다. 그러다가 멀리서 차소리라도 들리면 얼음이 되어 굳어있다가 재빨리 차도를 벗어나 인도 안쪽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하하하, 거기까지는 차가 안 간단다... 하면서 고양이의 유난스러운 행동에 나는 재미있다고 웃었는데 생각해 보니 길에서 죽는 고양이의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교통사고라는 뉴스가 떠올라서 웃을 수가 없었다. 위험에 대한 경고는 유전자에 저장되어 대대손손 생존의 본능으로 이어진다. 차에 치어 무참히 죽어간 어떤 길고양이의 억울한 원혼이 후대의 고양이들의 뼛속에 새겨져 멀리서 차소리만 들어도 몸을 숨기는 길고양이의 습성이 된다.
그러고 보니 회류는 꼬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양이의 꼬리는 앞을 본 채로 뒤돌아보지 않고 뒤를 탐지하는 촉수 같아서 가만히 두지를 않고 언제나 바닥을 휘젓는다. 꼬리로 자신의 반경을 그리면서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 레이다망에 무언가 걸리면 바로 몸을 돌려서 공격한다. 그래서 잘 때도 꼬리만은 몸밑으로 꼭꼭 감추고 절대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하게 한다. 아마도 그 언젠가 길고양이 중 누군가가 인간이든 무엇이든 어떤 것에 꼬리를 잡혀서 꼼짝없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이 죽음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꼬리를 잡히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배우지 않아도 알고, 차에 치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차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어미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일까.
산책길, 나를 졸졸 따라오는 길고양이. 강아지 같다.
염소처럼 풀잎을 야금야금 씹어먹기도 하고, 흙을 파고 잠깐 볼일을 보고 다시 흙을 덮는다. 적당한 곳에 발톱을 갈아 뾰족하게 다듬고 나름 분주하다. 쥐라도 발견하면 사냥도 해야 한다. 고양이는 산책에 다 계획이 있었다. 산책길의 제일 큰 복병은 다른 고양이를 만나는 것이다. 주택가에는 마당냥이들이 많은데 그런 냥이들을 만나면 10미터 거리를 두고도 서로 쳐다보며 대치한다. 걷다가 갑자기 굳은 채 멀리 응시하는 눈을 따라가 보면 저만치 다른 고양이와 둘이서 눈싸움을 하는 중이다. 생사가 걸린 문제 앞에서는 산책은 다른 세상 이야기. 그날의산책은 끝났다는 뜻이다. 이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직 세상에는 저 둘만 있다. 숨이 멎은 듯한 미동 없는 팽팽한 대치의 흔들림은 상대 녀석이 간격을 좁혀오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회류는 공격을 감지하고 그때부터 사람 목소리로 웅얼웅얼 말을 하는데 그 소리가 정말 사람의 말 같다. 굵은 저음의 남자 아저씨 목소리라고 할까. 고음의 야옹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내게는 이 싸움보다 신기할 따름이다. 둘 중 하나가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져야만 이 신경전은 끝난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계속 쫒고 쫓기면서 장기전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이런 영역싸움에서 얼굴이 할퀴어 발톱자국이 나고 입과 귀가 찢어지고 피가 났던 지난여름이 생각났다.
다른 고양이와 싸우고 깊은 상처를 입고도 평소와 똑같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야옹 소리는커녕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고 보통때와 똑같이 먹이를 먹었다. 먹이를 좀 오래 먹길래 머리를 살짝 쓰다듬는데 내 손에 피가 묻어났다. 그러나 피 같은 것 아랑곳없이 평상시와 달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기만 했다. 자연계에서는 약자일수록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약할수록 자신의 약한 것을 보인다는 것은 바로 공격의 대상이 되고 적에게 쉽게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프지만 아픈 것을 숨기는 고양이는 아프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 했지만 사실은 소리조차 낼 수도 없이 아팠다는 것을 상처에 약을 바를 때 알았다. 그때서야 소리를 내었다.
그 여름 이후 8개월이 지나고 지금 내 곁에서 우리는 같이 산책을 한다. 이제는 예전처럼 사투를 벌이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영역을 확보한 것일까. 우리 집이라는 자신의 확실한 영역이 생겨서 더 이상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 필요가 없어진 것이라면 나 또한 영광이라는 것을 고양이가 알아주면 좋겠다.
이제 집으로 가자, 일어서며 하는 나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서 딴 청을 피우던 회류가 따라 몸을 일으켰다. 나보다 먼저 앞서지 않는 고양이는 내가 무엇을 할지 기다린다. 선택지 앞에서 주저하는 고양이의 습성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천국의 문 앞에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서 있는 고양이를 보고 천사가 말했다. "들어갈 거니 말거니?"
나는 간다 하며 열 걸음 정도 가면 그제야 막 달려서 나를 따라잡고 저만치 내 앞에 있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는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