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서울마라톤을 마치고 당일 저녁에 바로 글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마무리는 조금 더 신경 써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기억이 희미해지고 당시 감정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말라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일단 글을 써 내려갑니다. 마지막이라고 어렵고 복잡하고 뭐 있어 보이는 그런 글 말고 가볍고 툭툭 놓고 써보겠습니다.
경기운영 ;
서울마라톤 당일의 날씨는 참 애매했습니다. 최고 기온이 7도 정도. 그런데 최고 기온이 새벽 06시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온이 4도 또는 3도까지 떨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경기 출발은 8시인데 10시를 전후로 비도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복장에 대한 고민이 컸습니다.
16도 17도의 따뜻한 기온. 체력저하. 수분부족. 축축한 옷에 체온을 계속 빼앗기는 상황에서 저체온증을 겪었기에. 서울마라톤 당일 날씨는 후반부 비까지 맞으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의는 반바지 타이즈, 상의는 타이즈 나시 그 위에 얇은 긴팔. 장갑. 드라이 핏 모자를 썼습니다. 출발 전까지 우비를 입고 있다가 출발하면서 바로 벗어던지고 경기를 뛰었습니다.
경기 출발직전까지 저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4분 페이스로 끝까지 밀고 갈 수 있을지. 후반에 무너지지 않을지. 무너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2시간 49분에 도전할 충분한 훈련을 했는지 등.. 물음표만 한 가득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명예의 전당 출발지에 들어섰는데 그동안 함께 훈련한 형님을 만났습니다. 형님은 3분 58초 정도로 일정하게 밀고 갈 테니. 뒤에 붙어보라고 했습니다. 4분 페이스를 혼자서 유지하며 스트레스를 받느니 형님 뒤에서 3분 58초로 따라가는 것이 더 좋은 상황이라고 판단. 그래서 딱 대서 출발했습니다.
DDP 회전구간까지 딱 5km만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명예의 전당에도 병목이 있었습니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페이스가 살짝 늦어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3-4km 정도까지 4분 2-3초 페이스로 느리게 출발했기에 앞에 이끌어가는 형님을 조금 더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청계천 구간에 접어들며 어느 정도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2시간 49분에 도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청계천이 이 페이스 인원들로도 가득 찼습니다. 앞서가던 형님의 페이스 3분 55초 이내로 조금 빨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따라가지 않고 한 걸음씩 놓아주며 거리가 벌어졌습니다.
그때 뒤쪽 저 멀리서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무더기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금 4분 페이스인데 차츰차츰 가까워지는 것이 3분 55초-4분을 정확히 달리는 그룹 같았습니다. 제 옆을 지나갈 때 살짝 따라가며 페이스를 확인해 보니 3분 58초가 찍혔습니다. 탑승.
그렇게 그룹을 따라 청계천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 형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다시 형님 뒤로 갈아탔고 청계천을 빠져나와 시원하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프 지점인 흥인지문을 지나며 제가 가지고 있던 의심들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습니다. 2시간 49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기분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직 경기는 많이 남았고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무거운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한참을 달려 29km 지점의 어린이 대공원 앞 언덕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 33km까지는 업다운이 조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덕에서 페이스가 4분 10초까지 밀렸지만 내리막에서 충분이 손실 부분을 만회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조급해하지 않고 형님과 편하게 달렸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30km 지점 서울숲 방향 얕은 언덕에서 발생했습니다. 그간 모든 훈련에 앞장서서 저와 동생을 이끌어 주었던 형님의 페이스가 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언덕이라서 그런 것인지. 힘들어서 페이스가 무너져 내리는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형님. 페이스가 조금 까지는데.”
“아 몰라 힘들다”
사실 저도 조금 고민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퍼져서 페이스가 까지는 것 같았기 때문에 힘을 써서 밀어야 하는지. 페이스를 낮추어 완주 모드로 전환해야 하는지 기로에 섰습니다. 제 결정은 밀고 가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한 겨울 아침. 칼바람 맞으며 훈련했던 것들을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눈이 정말 많이 내리는 아침 블리자드 같은 눈 속을 달리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날씨에도 249 하겠다고 훈련하러 나왔는데.. 후반부에 힘들어도 절대 안 놔야지 죽도록 뛰어야지”
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서울숲 고가도로 밑 언덕부터 제가 페이스를 잡고 갔습니다. 3분 55초와 3분 50초를 오가며 페이스를 이끌어갔습니다. 왕십리를 지나 잠실대교를 향하는 코스에서 저를 불안하게 하던 수많은 의심은 찾아볼 수 없고 확신으로 가득 찼습니다.
잠실대교 방향으로 우회전 후 롯데타워가 보이자 에너지가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는 남은 에너지를 모두 태워버리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페이스 조절은 필요치 않았습니다.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빨리 달려지지는 않았습니다. 3분 50초와 3분 45초를 오가는 정도의 페이스로 밀기 시작했습니다.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잠실대교만 지나면 내리막과 완전 평지 구간이 3km입니다. 퍼져도 2시간 49분이 가능한 상황. 그리고 여기서 퍼지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구간이었습니다. 잠실대교를 지나 우회전하니 강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니가 아무리 불어봐라. 내 경기는 이미 성공이다.
이렇게 경기는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2시간 49분보다 조금 더 빠른 2시간 47분으로 완주했습니다. 저는 달리기나 철인 3종경기에 참가해서 경기를 운영할 때의 마인드셋이 있습니다. “던지지 말자” 경기를 치르다 보면 변수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경기를 던지거나 놓고 마음 편하게 즐기다가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얻는 것도 없고 목표를 이룰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정해놓고 변수가 발생했을 때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를 고민해서 그때그때 대처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번 서울마라톤도 경기 중 계속해서 상황을 판단해 가며 경기를 뛰었던 것 같습니다.
준비 과정의 마인드 세팅 ; 탈력(벗을 탈 脫, 힘 력 力)
달리기에서 힘을 뺀다. 그러면 대부분은 달리는 중에 팔다리. 전신에서 힘을 빼고 리듬으로 뛴다고 이야기하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개념. 탈력을 준비과정 전반에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항상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으로 뜨겁게 시작하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식어버립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과 힘을 빼고 차분하고 꾸준히 하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인터벌 훈련을 할 때에도 으쌰으쌰 힘들게 뛰어보자는 마음을 버리고 계획된 만큼 정확히 훈련하겠다는 차분함 마음. 지속주도. 장거리 훈련도. 생활 패턴도 차분하고 힘을 쓰기보다 힘을 빼고 가벼운 마음으로 제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힘을 뺀다는 것. 더하기보다는 빼기로. 빠르게 보다는 천천히. 많이보다 적당히. 좋은 음식을 찾기보다 해로운 음식을 빼는 것으로. 차분히 한다는 것도 빼는 것도 최선을 다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빨리 달리고 과몰입하게 되고 매몰되어 스트레스받지 않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조깅 ; 달리지 않는 와이프와 함께 달릴 수 있을 정도
제 와이프는 달리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계속 달리며 체중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면 가끔 함께 달리기를 하겠다고 쫓아 나옵니다. 평소 조깅이 빨라도 6분 30초 페이스. 보통 7분대이기에 달리기를 하지 않는 와이프다 함께 달리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천천히 달리면 와이프가 물어봅니다. “이렇게 느리게 달려도 249를 할 수 있어?”
포인트 훈련을 제외한 조깅은 최대한 천천히. 피로를 해소한다는 마음. 대미지를 해소한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달렸습니다. 월 500km 정도를 피로감과 대미지 없이 소화하려면 강약 조절이 필수였습니다. 인터벌이나 지속주 훈련을 제외한 조깅에서도 페이스가 5분대 4분대로 달렸다면 몇 주 지나지 않아 제 몸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천천히 달리면 빨라진다. 천천히 달려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말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거리의 달리기가 되었든 후반에 무너지지 않고 밀고 가는 자신의 모습을 봐야. 느낄 수 있습니다.
포인트 훈련 ; 계획대로
특히 인터벌 훈련이 그런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빨리 달리고 조금 더 많이 달리면 마치 원하는 목표 기록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구태여 어려운 단어를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훈련 목적에 맞는 적당한 강도로 인터벌, 지속주, 빌드업 등을 진행해야 훈련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지.. 빠르게 많이 한다고 더 잘 달리고 목표 기록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령 역치 개선 훈련으로 목표를 잡고 계획했다면 실제 훈련에서도 계획한 페이스와 세트만 진행하는 것입니다. 훈련의 계획이라는 것은 계획만큼 열심히 하라는 이유이면서 계획보다 무리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계획보다 무리한 훈련은 다음 세션. 다음 달리기에 반드시 영향을 미치며 훈련이 연속성을 깨뜨리게 됩니다. 바로 이 부분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잘 놓여야 할 훈련들이 보기 싫게 이빨이 툭툭 빠지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고 대회 당일도 운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패해도 성공해도. 무엇을 잘 못해서 실패한 것인지. 내가 정말 잘해서 성공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명확지 않은 결과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 또한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와이프에게.
철인 3종경기 준비한다고 반년.. 마라톤 대회 준비한다고 반년.. 항상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뭘 해도 하고 있는 내 옆을 지키느라 너무 고생이 많아. 아침 일찍 달리겠다고 준비하는 나 때문에 잠 설치고. 운동 후에 영양 보충해야 한다고 음식 준비하고. 스트레스받는 나를 보며 눈치 보고 있는 너를 보면서 나도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았어. 하지만 한번 불만 이야기하지 않고 묵묵히 도와준 너에게 너무 고맙고.. 그래. 내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여자, 술, 도박에 미치는 것보다 운동에 미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했는데. 웃어주기도 하고.. 속으로는 미친놈이라고 했겠지만ㅋㅋ 고마워. 정말 내 인생에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엉망이었을 거야. 앞으로도 우리 행복하게 잘 살자. 그리고 나.. 26년 서울 마라톤에서 239…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