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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중독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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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숙경 Aug 12. 2023

4 새벽 공기

  새벽 3시다. 24시간 내내 불을 켜둔 실내 공기가 답답하다. 광고 포스터를 붙인 문을 열고 층계참으로 내려선다. 뿌옇게 머릿속을 휘감던 피로가 조금 사라진다. 손가락으로 창틀의 먼지를 톡톡 두드린다. 나는 아직도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걸까? 차들이 속도를 무시한 채 좁은 도로를 질주하는 것도 흐릿한 시야에서 멀게만 보인다. 그것들은 철갑상어처럼 전진한다. 방향을 틀어 옆의 차를 들이받아라. 그래야 놈은 굉음을 내며 나가떨어진다. 그 소리를 듣고 또 다른 철갑상어가 너의 옆구리를 기습하려 할 테고. 너는 단단히 준비를 하여 다른 놈들의 아가리를 쑤셔버려 박살을 내버려... 사라졌다가 다시 부활하는 철갑상어들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볍게 몸서리를 친다. 

  이제 차 소리마저 뜸하다. 도로 맞은편 24시간 편의점에는 사람이 하나 들어가서는 진열대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고개가 잠깐 들어 올려졌다가는 아래로 숙여진다. 헤엄을 치듯 위로 올랐다가 밑으로 가라앉는다. 시뮬레이션처럼 찬찬히 현실감 있게 움직인다. 물건을 다 골랐는지 계산대로 간다. 무엇일까. 아마도 일회용 면도기일지도 모른다. 면도기는 혐오를 잔뜩 머금고 조심스럽게 턱밑을 향한다. 유리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고 접히지도 않으면서 정면으로 칼을 받는다. 스륵스륵 자잘한 것들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얼굴은 깨어질 듯 창백한 빛을 반사하면서 비 온 뒤의 거리처럼 빛난다. 

  그는 자신의 전리품을 챙겨가지고 투명한 유리문을 통과해 사라진다. 또 다른 사람이 들어선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들어가서는 자기 머리통만 한 수박을, 아니 커다란 유방만 한 멜론을 가지고 나간다.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인가. 편의점에서 심장을 팔던지 해골을 팔던지 내가 알바가 아니다. 밝은 곳이 반드시 잘 보이는 것은 아니다. 어둠 속에서 납작 찌그러진 깡통과 툭 튀어나온 돌부리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뱉어낸다. 날이 밝으면 존재가 빛 속에 감추어질 것을 알고 있기나 한 듯이. 

  가로등에 붙어있는 광고지가 팔락거린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가위로 자른 전화번호가 오르락내리락한다. 개를 찾는 전단지도 붙어있다. 제발 찾아주세요. 아직 어리거든요. 찾아주시면 후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진도 붙어있다. 누군가 장난을 했는지 사진은 반쯤 찢겨 나갔다. 어떤 개가 사람에게 저리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에게 보다 더욱. 그건 위대한 개일 거라고 생각한다. 한동안 밖을 내다보다가 건물 지하에 여자가 아직 남아 있는지 궁금해졌다. 

  여자는 나보다 열 살은 위로 보였다. 간혹 이 시간에 밖을 내다보다가 여자가 남자를 부축해 차에 태워 보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곤 가방을 다시 고쳐 매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오른쪽 건물 끝으로 사라졌다. 내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한번 쓱 올려다본 후론 걸음을 똑바로 걸으려고 무지 애를 쓰는 게 역력해 보였다. 그럴수록 그녀의 걸음은 갈지자로 휘어졌는데 나를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와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은 한 번뿐이다. 지하 카페에 공동 전기요금을 받으러 갔었다. 문은 열려 있는데 아무도 없고 흘러간 팝송만 들려왔다. 십분 정도 탁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썰렁한 공기 속에 눅눅해지는 기분이 들어 일어섰다. 그때 그녀가 장을 봐 오는지 비닐 팩을 들고 들어오는 것과 마주쳤다. 내가 이층 피시방에서 전기요금을 받으러 왔다고 말하자 그녀는 실망한 낯빛이 되었다. “저 내일 가져다 드리면 안 될까요.” 여자는 조용히 말하였으나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렴 그깟 전기세 떼먹을 줄 아느냐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그러라고 말하고 나가려 하자 여자가 옆으로 다가왔다. “생맥주 한잔 드릴까요” 난감했다. 여자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술을 마실 기분도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의 얼굴이 무엇인가 낯이 익다. 어디선가 본 듯한 표정 없는 얼굴과 놀랍도록 실의도 희망도 없는 무연함. 이런 것들이 여자를 대하는 순간 묘한 흥분을 느끼는 동시에 기분 나쁜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눈은 호기심으로 빛나지만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자조의 빛이 섞여 있었다.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자 그녀는 그라스에 호프를 가득 채워 땅콩과 함께 가지고 왔다. 그녀는 오늘은 왠지 영업이 잘될 것 같다고 말하고서 살짝 웃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묻지 않았다. 결혼반지인지 그냥 끼고 있는 건지. 저 누구 닮았다고 안 해요?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아무 질문을 내던지듯 건넸다. “누구요?” 그녀는 생각나는 사람을 떠올리려 멍한 표정을 짓는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말이요. 만화에 나오는 여자 같아요.” 칭찬인지 뭔지 분간이 안 되는 듯 여자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예쁘다고요” 그러자 안심한 듯 웃었다. 얇은 종이의 찢어지는듯한 소리가 그녀의 목에서 걸러지지 않고 입술로 새어 나왔다. 치치, 좋아요. 기분 좋은데요. 한잔 더 드릴까요? 츠치치치. 그 소리를 듣자 나는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긴 생머리가 목을 지나 어깨로 흘러내려와 있다. 나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싫어 단숨에 마셔버리고 올라왔다. 

  여자의 웃음소리는 철갑상어 소리와 흡사했다. 마치 나를 비웃는듯한 마치 조롱하는듯한 그 소리는 폐부를 뚫고 내 안 깊숙이 박혀 들어왔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지하에서 끌어올려진 소리 같았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철갑상어 소리는 여자의 웃음소리일까. 아니면 깊은 한숨 소리일까.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소리에 민감한 걸까. 소리는 사람의 혼을 먹는지 모른다. 철갑상어의 소리는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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