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비밀과 진리가 있다
삶에 무슨 비밀이나 진리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삶에 비밀이나 진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말하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런 수준 낮은 허풍쟁이들의 특징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부정하게 하거나 현실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게 한다. 그래서 당신의 현실과 완전히 다른 비밀과 진리가 있으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꼬신다. 허풍쟁이들이 말하는 그런 것은 당연히 처음부터 없었으며 그 허풍쟁이들은 사실 진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에 현혹돼 정신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기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닌가 자기도 헷갈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교수들과 예술가들 중에도 있다. 진리 비슷한 걸 감지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고 아는 척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과 예술이 거짓을 가르친다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예술을 자기 마음대로 뒤섞어 놓고 자기 자리를 이용해 몇 푼짜리 분위기와 막돼먹은 성질로 자신의 무지를 가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바위 밑 이끼와 같은 존재들이니 가끔 잘한다고 어르고 달래주고 보내버리자.
우선 삶에는 물론 비밀과 진리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우리가 비에 완전히 젖어있는 것처럼 내 몸과 내 일상 거의 모든 틈새에 찝찝하게 숨어들어와 있는 것인데, 닦아내고 따로 모아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너무 가까워서 뻔히 보임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렵고 어딘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일상적인 내 삶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분리해 생각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내 삶을 나로부터 분리할 수가 있을까. 굳이 표현하자면 진리는 어떤 완전한 말이나 내용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 즉 ‘우리는 살아가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미 완전하게 도달해 있으며 언제나 완전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저항할 수 없고 우리는 그저 무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과 교육의 결과 우리는 바보가 되어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살아간다’는 사실 그것이 진리이다.
어제에 비해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는 오늘을 나는 또 어제처럼 살아간다. 그런데 어제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오늘을 또 살아가면서 그리고 결국 어제, 아니면 며칠 전 느꼈던 재미와 흥분을 마치 새로 느낀 것처럼 신나게 살아간다. 그래도 충분하다. 이미 수백 번은 반복되고 있는 그 하루들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단순히 하루하루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았던 삶을 또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이와 계절과 시간을 들먹이며 ‘아니, 새로운 봄이 온 거야’라고 최면을 걸고 있을 뿐이다. 아, 또 12월 31일 밤 12시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새로운 시간이라도 시작된 것처럼 박수를 치고 기뻐하겠지. 딱 1년 전 또 거기에서 딱 1년 전 포장지만 살짝 다른 똑같은 12월 31일을 그렇게 많이 보냈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라는 말은 원래 단순히 ‘언제나 틀리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년 전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보다 더 오래전 진짜 철학자들이 살아있던 시절, 진리는 ‘모든 것을 밝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알레테이아'라는 고대 그리스어에는 그 뜻이 담겨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알아가며 살아간다. 그 뜻은 동시에 우리는 무엇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무언가를 선명하게 보이게 하지만, 그 실체는 언제나 가상이다. 진리는 가상을 선명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힘이다. 다 알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무얼 모르는 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데에는 커다란 문제가 없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진리이다. 우리가 이미 그렇게 살고 있으니 삶이 곧 진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