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음의 배경음악 4.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눈 속의 나무들에는 죽음이 어른거리는 무서움이 있다. 그렇지만 나와 내 친구들의 마음속에 있는 푸른 소나무는 언제나 다정하고 한결같은 모습이다.
친구란 보통 비슷한 부류의 아이들이 자주 어울리고, 갈등을 겪고, 그것을 해소하면서 더 친해지고 하면서 더 끈끈한 관계로 맺어지곤 한다.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던 우리 여섯은 정말 비슷한 유형의 소년들이 비슷한 아픔과 감성을 공유하고 성장하면서 평생의 친구로까지 이어져왔다.
고등학교가 무시험의 추첨, 일명 뺑뺑이로 학교 배정을 시작한 지 대여섯 해가 지났을 때, 우리는 뺑뺑이를 통해, 명문이라고 할 수 없는 학교를 가게 되었다. 우중충한 학교 주변과 돌을 쌓아 만든 교문, 역시 돌로 외벽을 두른 본관의 모습은 참 착잡한 심정을 갖게 했다.
더 걱정스러웠던 것은 입학하자마자 공부는 대충 가르치고, 한 달 후에 있을 배구 경기에 맞춰 응원 연습을 중점적으로 시키는 것이었다. 응원단장은 말빨이 정말 센 3학년 선배였는데, ‘우리 학교는 교문에 이름이 있기 때문에 명문학교’라든가, ‘우리 학교 본관 건물은 돌로 치장을 해서 베르사유 궁전을 연상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곤 했다. 근데 사실, 난 그 말을 들으면 베르사유 보다는 바스티유 감옥이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3월의 쌀쌀한 날씨에 운동장 옆 계단이나 강당에 앉아 응원연습을 반복하다 보니, 학교가 점점 좋아지고 애교심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아마 세뇌라는 것이 그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미국 철도공사 노동자들의 노래였다고 하는 곡에 개사를 한 ‘불꽃처럼 타오르는 정열을 안고~~’하는 응원가는 수십 년이 지났어도 노래와 율동이 기억나는 걸 보면 세뇌의 효과는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한 달 후에 있었던 라이벌 고교와의 배구 정기전에서 우리는 참패하고 말았다. 우리 학교에는 고교생이지만 국가대표인 선수가 두 명이나 있었지만, 상대 학교의 한 명뿐인 국가대표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 선수는 워낙 발군의 기량을 갖고 있었던 장윤창 선수였으며, 그는 그 후 꽤 오랜동안 국내 배구계의 스타였다.
어쨌든 학년이 하나씩 올라가고, 이렇게 저렇게 친구들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서로 성향이 비슷한 여섯이 자주 뭉쳐 다니게 되었다. 우리 여섯의 여러 특징 중에서도 다른 친구들과 가장 특별한 점은 노래를 듣기도 좋아하고 부르기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중 한 명인 J는 나중에 서울대 성악과에 진학했고, H의 기타 실력은 나 같은 어설픈 동네 기타가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여섯 모두의 노래 실력은 평균 이상이었고, 아무나 노래를 시작하면 곧 4부 중창으로 펼쳐지곤 했다. 종로 2가 같은 번화한 길을 걸을 때에나, 눈 쌓인 경복궁에서, 또 코스모스 백화점의 피아노 판매점에서도 4부 화음으로 노래를 하곤 했던 우리를 나무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감탄 또는 여학생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길이 이어지곤 했다.
우리가 자주 불렀던 노래들은 ‘소나무야, 소나무야’를 대표곡으로, H가 작사, J가 작곡한 ‘밀알처럼’과 4부로 부르기 좋은 가벼운 가요나 팝송 등이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그런 소년들을 바라보는 눈길들이 대부분 우호적이었고, 격려를 해주는 분들도 많았다. 그때 사람들이 순박해서 그랬을까?
지금 고등학생들이 만에 하나 우리처럼 노래를 부른다면, 듣는 사람들은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동영상을 찍어 ‘이상한 애들’로 SNS에 올리지 않을까?
(이미지 : Pixabay)
미국 민요: 나는 철도를 놓았네 I've Been Working on the Railroad (← 이곳을 누르면 해당곡이 재생됩니다. 유튜브 링크입니다.)
불꽃같은 정열
원곡 : 미국 민요(유니온 퍼시픽 철도 공사 노동자들의 구전 민요)
개사 : 대신고등학교 응원부
불꽃처럼 타오르는 정열을 안고, 파도처럼 힘찬 투지로 우리는 나섰다
우렁찬 함성소리 하늘 끝까지 푸른 창공 구름 뚫고 울려 퍼져라
밤바라밤바밤 밤바라밤바밤 밤바라밤밤 밤밤 밤밤밤
밤바라밤바밤 밤바라밤바밤 밤바라밤밤 밤밤 밤밤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