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시작
"얘 착한 애야~"라고 증언할 만큼 착한 사람이 있는데, 그게 나다.
본인이 얘기하는 게 참 웃기지만 사실이다. 모나지 못해서 부탁은 다 들어주고 싫은 소리 못하고 끙끙 앓는 사람이 나였다. 모두에게 착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그래야 상대도 나에게 친절할 거란 생각에 때때로 버거운 부탁을 들어주곤 했었다. 그러다 잊혀진 약속과 부탁이 여러 개일 때도 있었고 내가 해준 것보다 부족한 상대의 반응에 상처받아 방에서 수만 가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어디서 잘못했을까?‘
‘내가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했나?’
그렇게 유리 같은 마음으로 20년 넘게 살아가다가 깨진 유리에 마음을 다치고 말았다.
야속하게도 힘든 일은 한 번에 휘몰아쳐왔다. 몇 년 동안 견디기 힘든 사건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20대 초반 당시 남자친구의 말실수로 의도치 않게 대학교 무리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그 이유로 남자친구와 헤어짐을 선택했다. 믿었던 오랜 친구들은 배신감을 안겨주었고, 가세가 기울면서 대학교를 졸업 여부가 불확실해지는 등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면 새로운 사건이 생겼다. 운명의 장난 같았다.
신은 그 자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힘든 일을 준다던데 내가 종교가 없어서 그런가?라는 생각도 들게 만들 정도였다. 신이고 기도고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나는 평범하고 편안한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인데 비련의 여주인공 마냥 에피소드가 끊이질 않았다는 게 힘들고 내일이 오는 게 싫었다. 또 같은 감정을 가지고 내일을 살아야 하니까.
어쨌든 일련의 많은 사건들로 나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서 옳은 판단도 힘들었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되면서 몸과 마음에 병이 생겼다. 매일 몸살을 달고 살면서 생에 처음으로 두드러기가 나고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도 했다. 병원이란 병원은 다 가보고 마지막으로 가보자 했던 정신의학과에서 나는 병명을 듣게 되었다.
스트레스성 공황장애입니다.
이유 없이 숨이 안 쉬어지는 경험을 처음 해봤다.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못하는 오래 달리기를 하고 온 듯 숨은 가쁘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잘 지내던 7평 남짓 자취방에서 잠들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취생활을 접고 본가로 돌아왔다. 처음엔 좋았다. 엄마가 밥도 챙겨주고 일도 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증상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부모님께 병을 숨길 수 없었고 펑펑 울면서 병명을 고백했다. 눈물이 많은 딸이지만, 잘 참았던 아이인걸 알기에 아무 말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본가에서도 잠 못 이루는 밤은 마찬가지였다. 밤마다 공황에 휘둘릴 때마다 부모님께 들키면 속상해할까 봐 숨죽여 혼자 아프다가 병이 커져버렸다. 책은커녕 핸드폰으로 드라마 한 편 보는 것도 힘들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져서 약을 먹고 잠만 잤다. 공부를 해야 했지만 핸드폰도 못 보는데 공부는 무슨 공부야 하며 또 잠만 잤다. 잠만 자는 내 모습이 부모님은 어느 순간 한심해 보이셨는지 뭐라도 하라고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면서 병이 더욱 심해졌다.
밤마다 숨 죽이며 공황을 숨겨주던 침대는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침대에 누우면 혼자 앓았던 공황증상이 시작되어 버려서 잠을 자지 못해 해결한 방법이 방바닥에서 자는 것이었다. 소음이 들리지 않게 헤드셋을 끼고 침대를 고이 모셔두고 방바닥에서 잠을 자니 며칠 동안 세상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낯선 환경이 불면과 공황을 해결해 주는 방법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원래 나였으면 하지 않았던 일을 하나 둘 해보기 시작했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
“돈 빌려줄 테니 어디든 여행 갔다 와.”
남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던 만큼 이젠 ‘나’를 위해 살아보자. 그리고 ‘살아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종종 술 마시며 편한 얘기를 하는 친구들에게 공황장애라고 고백했다. 반응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뭐 “괜찮아?”, “어떤데?” 하며 안쓰러워하는 눈빛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답답한 속마음을 어디든 얘기하고 싶어서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눈물을 훔쳤다.
이런 덩치 산만한 철없던 고등학생 남자애들이 언제 컸는지,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라고 했다. 혼자서 연고가 없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면 한결 나아진다는 조언이었다. 당시 나는 스스로에게 쓰는 돈을 아까워했기 때문에 나에게 투자하는 여행이란 상상도 못 했던 방법이었다. 그랬더니 돈 없으면 빌려줄 테니 당장 내일 여행을 떠나라고 할 수 있다고 동정이 아닌 응원을 해줬다.
이런 세심한 녀석! 갑자기 틀에 박힌 생각들이 조각조각 깨져버려서 바로 여행을 떠났다. 미리 배워 둔 운전이 쓸모가 있었다. 숙소를 잡아서 바로 드라이브 겸 여행을 떠났다. 가는 길이 신이 났다. 한동안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고 느껴도 불안함 뿐이었는데, 여행을 떠나는 길에 목이 쉬어라 노래를 부르며 원래의 ‘나’였다면 하지 않았을 혼밥과 혼여행, 혼셀카, 호캉스!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크게 색다른 걸 하지 않았다. 다른 건 혼자 해낼 수 있었다는 게 중요한 것이었다.
아직도 힘들 때마다 그 여행의 기억을 꺼내며 마음을 다스린다.
담배도 슬쩍 태워보았다.
담배 피우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건강에 너무나도 나쁘지만 호흡 조절하기에 이만한 게 없었다.(담배를 장려하지 않는다. 지금은 금연 중이다.) 매일 친구에게 힘들다며 어리광 부릴 수 없고 버틸 힘이 없었기에, 나름의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또 감사한 일은 흡연하는 것을 알게 된 친구(여행 장려 친구)는 “그런 걸 왜 시작하냐.”하면서도 마음을 이해해 주고 같이 담배를 태워주었다.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들을 하나 둘 시작했다. 과거의 나는 여리고, 두려움 많고, 도전이 무섭고, 어긋나길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틀을 하나씩 깨부수었다. 틀을 부시는 쾌감이 지나치게 짜릿했다.
그러면서 방황이 시작됐다. ‘원래 이런 건 내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불안함을 떨치고자 계속해서 쾌락을 찾았다. 술도 더 마시고 담배도 태우고 여행도 다니고 새벽에 나가 산책도 했다. 그러다 문득 ’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라는 물음이 계속되었다. 그 해답을 찾고자 아무 책을 사고 아무 노트를 사서 의식의 흐름 대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자아를 찾기 위해서.
하지만, 가만히 그런 생각만 하기엔 시간과 상황이 야속했다.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 하나 둘 취업을 하니 나도 불안한 마음에 아르바이트를 접고 일을 시작했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나는 전공을 살려 취업을 했다. 같이 일하는 연령이 매우 높았는데, 그 사이에서 일을 하려면 스스로 행동에 자신이 있어야 하고 당당해야 했다. 당당함이랑 거리가 멀었던 나는 힘든 시작이었다. 혼나기도 많이 혼났고 이리저리 치이기 일쑤였다. 속상한 마음에 일이 끝나면 담배 한 대 태우고 집에 들어가곤 했다.
시간이 약이었다.
수습기간이 지난 3개월쯤부터 자연스럽게 일할 때 자아와 퇴근 후 자아가 다른 게 형성되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고 일과 사생활은 분리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일기를 쓰며 생각했다. ‘내가 아닌 듯 나인 듯 살면서 상황마다 다르게 자아가 생기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일이 조금씩 쉬워졌다. 일 하면서 생긴 속상한 감정을 털고 퇴근하고, 일상에서 온 속상한 감정들을 털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다시 생각했다.
나인 듯 아닌 듯 행동하고 살아도 모든 게 ‘나’라는 걸 20살 중반에야 깨달았다. 생각보다 간단한데 깨닫기까지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다. 애써서 나를 한정 짓고 지나치게 벗어나면 되려 스스로를 옥죄었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던 게 아닐까? 나름의 일탈을 하면서 점점 편안한 구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그 지점에 머물며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확실하게 터득하지 못했지만, 진정한 ‘나’를 찾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남은 나의 진짜 친구들과 나는 이렇게 말한다.
혜메다의 인생은 진짜 시트콤이다.
남들은 한 번 겪기도 힘들만한 사건들을 연달아 겪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웃으며 술안주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얘기하기까지 몇 년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웃으며 얘기하지만 그만큼 힘들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곁에 남았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하다.
아직 힘든 시간과 상황에 놓여있지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잠깐의 정신 일탈을 통해 찾았다.
잠깐 흐트러져도 괜찮다. 오히려 그런 흐트러짐과 틀을 벗어남이 자아를 찾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할 테니, 힘든 사람들에게 마음껏 방황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방황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 과거의 내가 곁에 있다면, 마음껏 방황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한껏 방황하고 ‘나’를 찾아 돌아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