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이 사라지다
얼마 전 서울 사는 친구와 밥이나 한 끼 하자 약속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전철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전철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앉을자리는 없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섰다. 네댓 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앞 의자에 앉아 있다. 아이는 글씨를 배우는 중인 듯 행선 안내기에 다음 목적지가 올라오면 “여기는 부천역이래요. 여기는 구로역이래요.” 하며 엄마와 이야기를 나눈다. 말꼬리가 참 예쁘다. ‘고 녀석 똑똑하게 잘 배웠구나’ 싶다. 어른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모습이 귀엽고 기특해 보인다. 그렇게 가르친 그 부모도 훌륭해 보인다.
그런데 옆에 앉은 젊은 여자가 “엄마예요?” 하고 아이 엄마인듯한 여자분에게 묻는다. “예”하고 대답하자 “친엄마예요?”하고 재차 묻는다. 아이 엄마가 의아한 듯 “예 그런데 왜 그러시는데요?” 하고 물으니 “친엄마인데 말을 그렇게 하나 해서요.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네요” 한다. 엄마도 뭔가 이상한 듯한 표정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이건 무슨 말인가 싶어 어이가 없다. 엄마한테 존댓말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어찌 존댓말 쓰는 것이 친엄마가 아닌 듯 보일까, 그 자리에서 묻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시비조로 나갈까 봐 꾹 눌러 참았다. 세상이 변한 건지 내가 고지식한 내 틀에 갇힌 건지 헷갈린다. 나는 어린이집에서도 아이들에게 어른께는 존댓말과 정중한 인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며칠 후 한 학부모로부터 좀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원장님 우리 아이는 존댓말 쓰는 것 싫어요” 하고 말한다. 의아한 마음으로 이유를 묻자 엄마인 자기한테 존댓말을 사용하면 거리감이 생겨서 싫단다. 당황스럽다. 어찌 부모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면 거리가 멀어 보인단 말인가. 며칠 전 전철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부모한테 존댓말을 쓰면 계모처럼 보인다는 이야기, 격세지감이다. 요즘 젊은 엄마들의 생각이 다들 이런가 싶은 마음에 놀랍다. 부모의 교육관이라 인정해야 하는 건지 조심스럽다. 어른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것이 존댓말이라 생각해서 존댓말을 사용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 아가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내 소신을 간단히 말하고 다른 말은 아꼈다. 내 상식과 내 교육관으로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내 교육관이 흔들리며 혼란스러워진다. 내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시대적인 사고를 하는 건지…
나의 유년 시절은 한학을 하셨던 부모님께서 충과 효를 강조하시며 어린 자식들 교육에 엄격하셨다. 부모님께서 출타하셔서 1박을 하고 오시거나 자식이 밖에 나가 1박을 하고 오면 꼭 절을 드려야 했다. 그리고 친척 어른들이 집에 오시거나 우리가 친척 집을 방문했을 때도 조르르 앉아 공손히 절을 드렸다. 그것이 어른을 존중하는 것으로 알았다. 지금도 그 느낌이 좋다.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런 세대를 산 나는 아들아이가 초등학교 방학 때 고모 집에 며칠을 놀러 갔다. 고모 집에 도착하면 바로 고모부 고모님께 절을 드리라고 당부했다. 아들아이가 다녀와서 하는 말이 “엄마 저 다음부터는 절 안 할래요. 고모랑 고모부가 너무 어색해하셔서 민망했어요” 하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는 세월이 변했음을 인정하고 깨달았다. 그 뒤론 절을 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다. 예절도 세월의 변화에 따라 변함을 알아야 했다. 어느 한쪽이라도 불편하다면 결코 예(禮)가 아니라 생각했다.
또한 내가 어릴 적엔 어른들께는 “진지 잡수세요” 하고 밥 먹는 것을 높여서 말했다. 지금 진지라는 말을 사용하는 젊은이가 없는 듯하다. 모두가 “식사하세요.”라 한다.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식사(食事) 밥 먹는 일 하라는 뜻이다. 나는 아직도 그 식사란 말을 어른께 사용하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내 생각을 이야기하며 상대의 생각을 묻곤 한다. 보통 식사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내가 변해야 할 부분이란 생각도 든다. 어느 선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요즘 세대의 생각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수용해야 하며 내가 어느 정도 변해야 하는지 기준이 모호해진다.
아이가 언어를 배우고 언어로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하는 시기인 영유아기에 존댓말 교육도 적당히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지도했다. 그런 내 교육관에도 격세지감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체크해 보게 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 특히 자기의 부모님께 존댓말을 사용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들었다. 이제는 존댓말이 없는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영어에서 ‘you’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상대를 표현하는 것처럼 ‘너’란 말 하나로 상대를 표현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좀 더 고심해 봐야 할 문제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간편해지는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한동안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변화하는 세태를 탓하기에 앞서 시대에 맞게 적응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