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은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권위나 사회적 통념에 따르지 않고 반항하는 기질을 우리는 반골(反骨)이라고 부른다. 노 전 대통령은 중학생 시절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교내 이승만 대통령 찬양 글짓기 행사를 거부할 만큼 불의에 대한 저항심이 강했다. 한때 남들처럼 시류에 편승하고 산적도 있지만 결국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노 전 대통령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갈대처럼 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제17회 사법시험에서 유일한 고졸 출신 합격자로 1977년 대전지방법원의 판사로 임용됐다. 판사 일은 단조로웠고 좋은 판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5개월 만에 그만뒀다. 그렇게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고 세무·회계 전문으로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그가 처음부터 인권변호사는 아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평범한 변호사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변호사 인생의 전환점은 1981년 부림사건이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부산에서 사회과학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구속했다.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박현채 교수의 '민족경제론',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불온서적을 읽고 공산주의혁명을 획책했다는 부산 최대의 공안조작사건이다. 이들은 최대 63일간 불법감금, 협박, 구타, 물고문을 당했고 순식간에 공산주의자로 탈바꿈됐다. 이는 국가보안법이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된다.
노 전 대통령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유명했던 김광일 변호사의 권유로 무료 변론에 나서게 됐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이 시작됐다. 노 전 대통령은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라고 회상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군사 독재 시절 억울한 노동자,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변론이 대표적이다.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미국의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독재정권 비호에 항의하기 위해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전두환 정권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을 도왔다는 혐의로 가톨릭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가 구속됐다. 노 전 대통령은 학생들의 변호를 맡아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때문에 1년 6개월가량 부산일보의 생활법률상담 연재를 그만두게 됐다.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최전선에 있었다. 6월 항쟁은 12·12 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노 전 대통령은 국민운동본부 부산 본부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부산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추모대회에서 경찰에 연행돼 문재인·김광일 변호사와 함께 대공분실에 구금되기도 했다. 이렇게 전국에서 저항운동이 확산되자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은 6·29 선언을 발표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1987년 6월 부산 한진중공업 노동자 사건은 노동자 권리 운동의 한 획을 그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노출돼 있었고 파업을 단행했다. 노 전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부당 해고와 경찰의 강압적인 진압에 맞서 싸우는 데 법률적 지원을 했다. 이들이 구속되고 고소당했을 때는 법정에서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 전 대통령이 노동 인권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이다.
1987년 8월 거제도 대우조선에서는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은 파업을 무리하게 진압했고 노동자 이석규씨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제삼자 개입 및 장식(葬式) 방해 혐의로 구속됐고,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군사 독재 시절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위해 힘을 썼다. 그의 행보는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됐고 정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반골이 필요하다. 소위 학창 시절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은 대부분은 정해진 커리큘럼대로 인생을 설계해 왔다. 정치적 성향이 진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높은 수능점수, 좋은 직업・고소득, 안정된 생활을 추구한다. 자연스럽게 기득권 논리에 스며들었고, 진보적 상상력은 급진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예전 진보의 야성(野性)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