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시내를 헤매다
홍콩에서의 셋째 날은 숙소 조식 대신 근처 식당에서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홍콩 파크모텔은 조식을 무료로 제공해 주셔서 편하게 아침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그래도 하루 정도는 조식 대신 원하는 브런치 메뉴를 먹고 싶다는 학생들의 의견이 많아서 시간여유가 있는 셋째 날에 근처 식당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룹별로 취향에 따라 홍콩식 아침식사를 고르기도 하고, 샌드위치 등 브런치 카페를 선택하기도 했다. 식당을 정하고,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각자 주문을 하고 결제를 하는, 누군가에게는 아주 단순한 이 과정은 발달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배움의 시간이다.
실제로 돈 계산에 자신이 없는 K는 교내 카페에서도 좀처럼 혼자 음료를 사 먹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일상에서는 크게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때가 되면 누군가 챙겨주는 식사를 하면 되니까.
하지만 자유여행에서는 다르다.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그것을 빠르게 깨닫는다.
늘 '괜찮아요, 먹고 싶지 않아요'로 상황을 모면하던 K는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다. 바로 'OOO이랑 같은 걸로요'이다.
친구들이 메뉴를 고르기를 기다렸다가 재빠르게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른다. 그리고 쉬운 영어나 메뉴판을 가리키는 방식으로 주문을 하고, 카드로 결제를 한다. 한 번, 두 번 쌓인 경험은 자신감이 되고, 여행 사흘차가 되자 선택과 실행은 훨씬 수월해져, 한국에서는 지갑도 들고 다니지 않는 친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무리 없이 K는 여행에 참여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룹별로 아침을 먹은 후에는 다 함께 침사추이 역에 모여 지하철을 타고 피크트램으로 향했다.
피크트램은 홍콩의 빌딩숲과 빅토리아 하버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빅토리아 피크에 오르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아이들이 디즈니월드 다음으로 가장 가고 싶어 한 곳이다. 옥토퍼스 카드로도 이용할 수 있지만 우리는 피크트램 타워의 스카이테라스 입장권이 포함된 왕복 티켓을 끊어서 사용했다.
45도가 넘는 급경사를 트램으로 오르며 한 아이가 감탄했다.
"와! 밖에 건물들이 다 기울어져 있어요, 신기해요!"
"......기울어진 건 우리야. 건물은 똑바로 서 있어."
"아."
창 밖을 구경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트램은 빅토리아 피크에 도착했다. 거기서 타워 꼭대기로 올라가면 홍콩의 전망을 볼 수 있는 스카이 테라스가 나온다. 야경을 보러도 많이 오는 곳이지만, 우리는 밤에는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에 가기로 했기 때문에 낮에 오게 되었다.
한낮의 쨍한 풍경도 멋진 곳이었다. 물론 무척 더웠다. 그래도 인증샷은 필수. 무더위와 싸우며 풍경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었다.
피크트램에서 내려온 이후에는 다시 그룹별로 흩어졌다. 우리 조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갔다가 딤섬을 먹고, 대관람차를 타기로 계획을 했었다. 홍콩에서 처음으로 지하철 이외의 대중교통과 도보 길 찾기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일정이었다.
자유여행을 기획할 때 여행지 후보를 선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지하철로 여행이 가능한가이다. 버스보다는 지하철이 노선도를 이해하고 정류장, 환승 경로 등을 찾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기에는 아무래도 버스나 택시는 불편함이 있다.
사실 단체는 자유여행을 온전히 즐기기에 아쉬운 면이 없잖아 있다. 학교에서는 단체여행 이외에는 진행하기가 어렵지만 자유여행의 진짜 매력을 느끼려면 소그룹, 이왕이면 서로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을 해보아야 한다.
여행은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느냐 만큼 '누구와 함께 하는가'가 중요하다. 아이들이 우리의 여행을 다른 여행보다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쉬운 대로 단체여행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우리는 매 활동마다 아이들 스스로 원하는 소그룹을 형성하게 하여 '따로 또 같이' 여행을 진행해 왔다. 특히 이 날은 그룹별로 활동의 동선이 크게 차이가 있는 날이었다.
IFC몰,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소호, 란콰이펑, 대관람차 등 원하는 활동에 따라 4그룹으로 나누어졌고, 점심식사와 관광을 한 뒤 밤에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소그룹으로 나누어지면 각자의 역할은 더 중요해진다. 자유여행은 '스스로' 하는 것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단체로 움직이다 보면 한계가 있다. 팀플이 의례 그러하듯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과 조용히 묻어가는 사람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데, 인원이 줄어들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부분의 경우 발달장애인들은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고 역할을 수행해 본 경험이 많지 않다. 솔직히 인솔하는 입장에서는 여러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것보다 단체로 일괄 움직이는 것이 훨씬 편하고 에너지가 덜 들어간다. 그럼에도 힘들게 자유여행을 운영하는 것은 우리의 수고로움이 아이들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기가 정류장인데?"
"공사 중인데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소호 등 주요 관광지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은 한창 공사 중인 곳이 많았고, 구글 지도에는 분명히 버스 정류장이 있고 버스가 오고 있다고 뜨지만 실제로는 오지 않거나 버스가 서지 않고 지나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점심식사까지는 무사히 미션을 클리어했지만 대관람차를 타러 이동하는 길이 문제였다.
날은 덥고 다리는 아프고, 나조차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대관람차를 꼭 타야겠니'하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대관람차는 우리 조의 가장 핵심 관광지였다.
결국 버스의 경로를 따라 대로변까지 걸어서 내려가 보기로 했다. 짜증이 날 법한 상황이었건만 아이들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걸었다.
심지어 뇌병변으로 걷는 것이 다른 친구들보다 느리고 힘든 아이도 있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오는 게 더없이 기특했다. 1학년 첫 프로젝트 수업 때는 조금만 걸어도 힘들다며 도움을 요청하던 아이였는데, 충분히 힘들만한 상황에서도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를 다짐하는 모습이 뭉클했다. 조금씩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모든 고생을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의 약이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간 끝에 결국 대로변 버스 정류장에서 대관람차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어렵게 탄 대관람차는 우리가 어렵게 찾아온 걸 아는지 세 바퀴나 돌았다. 사실 처음엔 세 바퀴나 도는지 모르고 당황했다. 고장이 났나 하차벨을 눌러야 세워주는 건가 등을 고민했지만 알고 보니 원래 세 바퀴씩 도는 거였다.
대관람차를 타고, IFC몰에 잠깐 들러 기화병가 등 쇼핑도 하고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으로 향했다.
지하철로 가는 터라 찾는 길은 어렵지 않았으나 홍콩의 지하철 역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퉁청선의 홍콩 역부터 츈완선의 센트럴 역이 모두 연결되어 있었는데, 안내 표시를 따라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고 설상가상 퇴근길 인파가 맞물려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다시 한번 목적지와 경로를 숙지시켰다.
서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수시로 위치를 확인하였으나 동선이 길어지자 아이들의 속도에 따라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틈새로 다른 사람들이 밀려들었고, 마침내 츈완선을 타는 곳으로 내려갔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센트럴 역으로 내려간 H가 주위에 일행이 보이지 않자 이미 지하철을 탔을 거라 착각하고 혼자 지하철에 타버린 것이다. 지하철은 곧바로 출발해 버렸고, 그제야 지하철에 혼자 탔음을 알아챈 H가 당황하여 연락이 왔다.
"괜찮아, 다시 돌아오면 되니까 일단 다음 역에서 내려서 어디인지 역 이름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봐."
여행을 준비하며 했던 사전교육에는 어플을 보며 길을 찾는 방법뿐만 아니라 길을 잃었을 때 대처하는 방법도 가르쳤다. 주변의 큰 간판을 찾아 설명하거나 영상통화로 주위를 보여주기, 어플로 나의 위치를 공유하기 등을 연습했고, 안전장치로 위치 추적 어플도 깔고 여행을 떠났다.
교실 밖 교육에는 늘 위험부담이 따른다.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지만 우리가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예방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문제가 생길 것이 두려워 시도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성장할 수 없다. 완벽한 보호자보다는 함께 헤쳐나가는 동반자가 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이다.
다행히 센트럴 역이 종점이었고, H가 보내온 사진을 보니 바로 다음 정거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내려서 기다리라고 한 뒤 다음 지하철을 타고 가서 무사히 H를 만났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H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에게 주변에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는 절대로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연락을 먼저 할 것을 당부했다. 사전교육에서 대처방법을 배울 때보다 훨씬 집중하며 주의사항을 새기는 모습들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에 도착했을 때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문을 연 가게도, 방문한 손님들도 많지 않아서 짧게 돌아보고 스트리트푸드파이터에 나왔다는 맛집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느지막이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 비가 내렸다. 그 비가 심상치 않은 예고편이었음을 그때는 아직 몰랐다. 이때까지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은 그저 애피타이저였음을... 진짜 위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