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가족과 지인을 떠나보냈다.
나는 미국에서 코로나 19 유행 초창기를 보냈다. 그것도 대유행이 심각하게 번지던 뉴욕과 가까운 동부의 도시에 있었다. 그 당시 대학원 지인들 혹은 교수님들의 가족들이 코로나로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이 참 많이 진행되었다.
뉴스로 보고되는 확진자 숫자가 무서운 숫자로 매주 갱신되었다. 처음에 몇십 명에서 금방 만 명이 되었을 때 너무나 놀랐는데 그 숫자는 십만 명, 백만 명대로 늘어갔다. 미국에서는 장례식장이 부족할 정도였다. 병원에서도 영안실이 이미 꽉 차서 간호사 스테이션에 잠시 사망한 환자의 시신을 보관할 정도라는 뉴스 기사도 나왔다. 내 가족이 아니어도 침울한 분위기와 슬픔이 많이 느껴졌던 것이 기억이 난다.
점점 유행이 거세지면서 지인들에게 잘 지내냐는 인사도 함부로 건네기 어렵게 느껴졌다. 몇 달 후에는 대면으로 만나기보다는 온라인으로만 소통하게 되었지만 밝은 인사는 어려웠다. 서로 공적인 이메일을 보내거나 화상 회의를 할 때도 잘 지내는지 묻는 대신 다들 “잘 버티고 있냐”, “가족들이 건강하시기를 바란다”라고 첫인사를 건네는 정도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는 미국에서 지낸 시간 때문에 상대적으로 코로나로 인한 변화를 급격하게, 그리고 더 크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 그 당시 한국 상황은 어떤지 자세히 모르니 정말 많이 걱정하고 마음 졸였었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 중에는 마스크를 쓰고 조심하는 생활은 하지만 코로나로 인한 영향을 아주 크게 느끼지는 못한다고 이야기해서 놀라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원래 배달 서비스가 잘 갖춰져있기도 하고 여러 가게나 정부 기관들이 팬데믹 와중에도 거의 다 운영을 했다고 들었다. 나는 마스크를 구하기도 어려워 나가기도 힘들거니와 가게들도 문을 닫거나 음식 배달이 안 되는 가게가 대부분이라 애를 먹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시간차가 있을 뿐 한국도 일상에 영향을 분명 받았다. 1년, 2년, 3년..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 길어지면서 한국에서도 어르신들의 사망률이 높아졌다. 내 주위에서도 연로하신 가족을 떠나보낸 지인들이 늘어갔다. 요양원에서 일할 때도 코로나19 감염이 된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연구자로 일하면서 본 통계 수치에서도 코로나 기간 한국과 많은 나라들의 요양원에서 노인 사망률이 특히 높았다. 이 질환은 하필 특히나 약한 사람들을 더 노리는지, 쉽게 사망까지 이르게 하는 건지 야속하게 느껴졌다.
일상에서 소중히 여기던 것들도 많이 바뀌거나 잃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결혼을 미루거나 졸업, 취업, 유학 등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취소하거나 계획을 바꾸는 지인들도 많아졌다.
나의 인생 계획도 꽤나 많이 바뀌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나는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는 것이 무의식적으로라도 크나큰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끼던 사람들이 떠난 것에 대한 애도.
일상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만큼 변한 현실, 그 상실에 대한 애도.
격리를 해야 할 만큼 전염성이 심했고 증상도 심했던 코로나 초기, 나는 서로 조심하느라 제대로 인사조차 못하고 헤어진 친구들과 지인들이 많았다. 각자의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 고향은 미국 내 다른 도시일 수도 있었고 아예 다른 나라일 수도 있었다. 나 또한 락다운 기간 몇 달 버티다가 생활이 어려워지는 걸 느끼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나마 문을 연 몇 안 되는 슈퍼에 가다가 길에서 만난 뉴질랜드 출신 친구가 미국에 남고 싶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간다길래 서로 인사를 건넨 것이 몇 안 되는 면대면 인사였다. 언젠가 헤어질 사이일지라도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작별한 것이 못내 마음에 남았었다.
2020년 뉴욕타임스에서 1면에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 천 명의 이름과 짧은 부고를 적은 추모 기사를 낸 적이 있다. 그 기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 화제였다. 나도 그 기사를 보고 왜인지 모르게 위로가 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기억이 있다.
사진: New York Times 기사
사망과 임종 연구의 선구자로 불리는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는 애도에 5개 단계가 있다고 했다. 정서적으로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을 단계적으로 거친다는 것이다. 수용의 단계까지 가서 잘 받아들이려면 장례식과 같은 절차뿐 아니라 진심으로 작별하기 위한 시간과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 같다.
남은 사람들이 떠난 이들을 잘 보내주고 다시 잘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애도가 필요할 것이다. 코로나 19 유행시기를 잘 버텨온 모두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다.
많은 상실에 대해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