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노아 Apr 02. 2024

컨테이너 액체의 정체는?

대략 난감!! 

최근에 모스크바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20년이 넘도록 10여 개국에서 한국 기업의 법인 대표로 지내다 고향 땅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이라는 현실에 따라붙은 설렘, 호기심, 기대, 아쉬움, 우려 등 느낄 수 있는 웬 갖가지 것들이 머릿속, 감정 속에 겹쳐 뒤섞여 있었다. 마음 한쪽에서는 한국에서도 가족과 나에게 좋은 일이 넘쳐나길 바라는 기대와 모스크바를 떠나는 마음을 정리 못하는 아쉬움이 겹쳐 있었다. 마음의 다른 한쪽에는 뭔가 즐거운 일들이 일어나길 바라는 설렘과 한국이 어떻게 변했는지 호기심이 겹쳐 있었다.


여러 마음을 담아 귀국한 지 벌써 3개월, 그 3개월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버렸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못 느낄 정도였다. 고향 한국에서 발을 딛고 살기 시작했고 부지런히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있으니 기대대로 좋은 일과 즐거운 만남들이 많을 듯하다. 20여 년 해외 생활 후, 3개월간의 한국 세팅 기간, 조금의 아쉬움은 있지만 그런대로 잘 보낸 것 같아서 스스로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10점 만점에 8점으로.. 




모스크바에서 부친 이삿짐이 아직 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다. 모스크바를 떠날 때 이민가방 6개에 임시 살림을 담아서 왔는데 3개월이 지나니 부족한 것들이 많다. 당장 옷가지들도 봄을 맞을 준비가 안된 상태이다. 대외 활동을 위한 양복, 와이셔츠와 평상복들도 턱없이 부족하다. 모스크바에서 출발할 때 꼼꼼하게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이삿짐 배달이 늦어지니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삿짐 배달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 러-우 사태로 인한 배송 경로 제한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타국으로 이동하는 루트는 여전히 제한된 상태이지만 2.5개월 정도면 배달이 될 것으로 계산하고 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삿짐 배송 지연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이삿짐 업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다니엘 씨, 러시아 측 이삿짐 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삿짐이 러시아 국경을 넘어올 때 세관 검사가 있었는데, 컨테이너 안에서 액체가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액체라니요?”


당황, 황당한 상황에서 사태 파악이 안 되어 계속 질문을 했다.


“이삿짐에서 액체가 나올게 뭐가 있을까요? 무슨 액체라고 하던가요?”

“러시아 세관에서 액체 문제로 이삿짐에 이슈를 걸었나요?”


러시아는 나갈 물건에 대한 세관 통관이 까다롭지 않은 편이었는데 러-우 사태 이후, 러시아내에서 반출되는 물건들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그림, 악기, 도자기 등의 예술품들에 대한 반출을 엄격히 규제하기 시작했기에 이삿짐 반출 시에 컨테이너를 열어서 확인을 한다고 했다. 이 사실을 사전에 알았고 갖고 있던 악기들_피아노, 색소폰, 바이올린 등_를 팔고 이삿짐을 꾸렸기에 딱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액체가 흘러내린다고 하니 전혀 예상도 못한 상황이었다. 아뿔싸! 순간, 러시아 세관에서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일까? 싶었다. 세관이 시비를 걸면, 해결하는 프로세스가 쉽지 않음을 알기에 무척 신경이 쓰였다.


이삿짐이 당장 와야 하는 상황인데 이삿짐에 액체가 흘러 세관에 잡혀 있다니..




액체의 실체를 우선 파악을 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액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흘러내릴 수 있는 액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거참, 이렇게 답답할 수가..


“러시아 이삿짐 회사에 연락하여 액체가 뭔지 확인을 해주세요. 이삿짐이 빨리 와야 하는 상황입니다”


다음날, 한국에 있는 이삿짐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그 액체의 실체를 알아냈다면서.. 


“다니엘 선생님, 그 액체는 와인이랍니다” 


허걱. 와인이라니!!!! 

이거야말로 대형사고였다. 


와인이 박스에서 흘러나왔다고 하니 다른 박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더군다나 물들면 빠지지 않는 와인이 다른 박스로 침입을 한 것이니.. 와인이 침구 박스로 흘러 들어갔다면 침구가 와인으로 물 들었을 것이다. 의류 박스에 들어갔다면 의류가 망가졌을 것이고 책 박스로 들어갔다면 책들이 망가졌을 것이다. 대략 난감이란 표현이 딱인 상황이었다.


세관 통관이 문제가 아니었다. 와인으로 인해 다른 짐들이 크게 화를 입었을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걱정은 우선 접어두고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인지 이삿짐 업체에 따져 물어야 했다. 어떻게 포장을 했기에 와인이 박스에서 새어 나온다 말인가?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포장을 어떻게 하신 겁니까?”


와인이 새게 된 원인부터 파악을 하고, 와인 유출로 인한 다른 박스들 손실에 대해서도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대답은 이러했다. 이삿짐 컨테이너가 국경 근처에서 통관을 위해 한 달 이상 야적장에서 노출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온도가 많이 떨어져 와인병이 얼기 시작했고, 코르크마개가 터져 열렸고 가로로 눕혀져 있던 와인이 흘러나온 것이라 했다. 액체가 흘러내리던 박스 한 개를 러시아 세관에서 열었는데 그 안에 있던 모든 와인이 다 터졌다고 했다. 와인 박스 주변의 박스들도 와인 컬러로 물들었다고 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사서 모아둔 60여 병의 와인을 이번에 이삿짐으로 부쳤는데 모든 와인들이 다 터졌다는 얘기였다. 이를 어쩌란 말인가? 아까운 와인들, 그리고 쏟아진 와인들이 컨테이너 안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 걱정은 세관이 나에게 시비를 거는 걸까? 에서 와인 때문에 옷가지들이 모두 물들었으면 어쩌나? 에서 아.. 그 아까운 60병의 와인을 어쩌지?로... 이렇게 전화 한 통화로 걱정이 여기저기로 분수처럼 번져나갔다. 걱정은 '돌이킬 수 없는' 강도가 셀수록 가슴을 후벼 팠다. 내겐 깨진 60병이 와인이 젤 속상했다. 


분명 아주 오래전에 와인셀러의 온도컨트롤이 잘못되어 낭패를 봤던 경험이 있었는데 왜 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지? 내가 뭘 체크하지 못했던 것이지? 


아! 러시아의 날씨였다!


러시아에서 중국을 거쳐 오는 루트이기에 적도를 지나오는 루트보다 오히려 와인 보관 상태가 좋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뱉은 말처럼 

엎질러진 물처럼

깨진 와인도 돌이킬 수 없다.


가장 센 걱정은 이제 걱정에서 제외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포기지.


이제 걱정은 이제 기도로 바뀐다. 제발 흘러내린 와인 때문에 손실이나 크게 보지 않기를... 하며 말이다. 

그런데 이내 잠깐의 기도 뒤에 또 걱정이 붙어 버렸다.


이건 뭐, 이삿짐이 도착하는 것이 더 큰 걱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참, 난감한 상황이네…


이전 14화 반려견 코디, 숨겨진 본능을 드러내며 마음을 흔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