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눈이 떠지고 마음은 소풍가는 어린아이마냥 들떠 있다. 이 나이에 이런 기분 참 오랜만이다. 10분이 멀다 하고 시계를 쳐다보고 괜히 이책저책 들춰보며 느리게 가는 시간에 탓을 돌리기도 하고 그러다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딘거야?'하며 와이프에게 심통도 부린다.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더니 내 나이가 벌써 그런 나이인가?
사실 오늘은 캐나다에 살고 있는 큰딸이 도착하는 날이다. 오후 4시30분에 인천공항 도착이니, 아이고 무려 6시간이나 남았다. 늘 바쁘다 바쁘다 시간에 쫒겨 사는 내게 시간이 사라진걸까?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일상을 져버릴 정도로 강하게 애틋한 마음인걸까, 오전 내내 내게 주어진 일은 시간을 재촉하며 마냥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 할일이 없다.
게다가 눈에 아른거리는 코디도 온다. 코디는 딸아이의 반려견이다. 얼마전까지 분리불안이 심해 치료까지 받았던 녀석이 15시간 가량을 그 좁은 케이지에 갇혀 있을 것을 생각하니 이번엔 가슴이 미어진다. 아직 손주가 없는 나는 공감하지 못했던 단어, 내리사랑. 자식보다 손주가 더 이쁘다더니, 살짝 그 마음의 언저리정도는 느껴진다. 딸아이 못지 않게 코디도 너무나 보고 싶다. 얼른 안고 싶고 마구마구 부비고 싶다.
내게 아직도 이런 소년같은 감성이 남아있을 줄 몰랐다. 계속 따로 살았던 아이라 충분히 우리는 각자의 삶에 익숙한데도 부모맘이 다 그런건지, 내 안에서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사랑이 몽글몽글 솟아나는 건지, 그리움, 기다림의 정서가 이 나이 되서야 내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건지, 그러면서 '사랑'이 이런건가도 싶다.
비행기는 30여분 빨리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도착 게이트 문이 열릴 때마다 목을 길게 빼고 살피기 시작한다. 저 멀리서 딸아이 모습이 보이고 짐가방 위에 놓인 작은 캐리어도 보인다. 저 작은 가방 안에는 분명 코디가 쪼그리고 있을 것임이다. 게이트 밖으로 나온 딸아이는 우리를 발견하고도 덤덤히 걸어 나온다. 무척 차분한 모습이다. 여느 때 같으면 한국 도착 자체로 즐거움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데, 비행 동안 코디에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언뜻 봐도 딸아이는 지쳐 보인다. 딸아이와 코디를 만나서 무척 반갑지만 다소 힘들어하는 모습에는 마음이 안쓰러워진다.
아내 또한 딸아이의 모습에 안쓰러움이 컸는지 딸아이를 격하게 안고 긴 포옹을 한다. 따뜻한 엄마의 가슴에 안긴 딸아이는 그제야 기분이 나아지는지 미소로 화답하고, 오는 동안 힘들었다고 투정을 부린다. 딸아이다운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나아진다. 딸은 코디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코디 걱정을 잊지 않는다. 마치 엄마가 아이 걱정하는 모습처럼……
나와 아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딸아이에서 코디로 옮겨간다. 소프트캐리어 안을 들여다보니 코디가 축 늘어져 있다. 이 녀석도 확실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잠을 자게 하는 수면유도제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곧 정신을 차리겠지만 당분간 잘 돌봐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짐 가방을 차에 싣는 순간부터 딸아이와 코디의 3주간 한국 생활은 본격 시작된다. 어떤 일상이 일어날까? 2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6개월 만에 부모와 만나는 딸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낯선 곳에서의 코디 반응은 어떠할까? 코디와 소통은 잘 될까? 여러 가지가 궁금하면서도 즐겁고 재미나는 일들이 많을 것이라 기대가 된다. 한편으로는, 딸아이의 껌딱지, 분리불안 반려견 코디의 캐나다 생활이 한국으로 옮겨졌으니 부딪혀보면 분리불안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새 환경에 어떻게 적응을 하는지, 딸아이와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차에서 이동하는 동안, 딸아이는 점점 본래의 활달한 모습을 찾아가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나열한다. 해외에서 20년을 넘게 생활한 아이인데 먹고 싶다고 나열한 음식 리스트를 보면, 그 입맛은 여전히 토속적이다. 산 낙지, 전복회, 킹크랩, 곱창이 그 음식들인데 참으로 입맛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문득 코디의 음식도 궁금하여 물어보니 캐나다에서 먹던 사료를 가져왔다 하며, 고기를 구워 조금씩 주면 된다고 한다. 그리 까다롭지는 않다고 하는데 이 또한 부딪혀 보면 알 일이다. 물갈이와 음식갈이가 없어야 할 텐데…
차 안에서 딸아이의 품에 안겨 한참을 가는 동안에 코디는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처음 보는 차 환경에 어색한 듯하고 약 6개월 만에 만나는 아내와 나의 모습에는 낯이 익는다는 표정이다. 코디가 정신을 차린 듯 하자 아내는 “코디”라고 불러보지만 코디는 미동도 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곧 익숙해지겠지만 어리바리, 어리둥절한 코디의 표정은 재미있고 귀엽기만 하다.
딸아이는 아내와 내가 머물다 온 토론토 호텔 얘기를 이어간다. 작년 말, 아내와 나는 토론토에 있는 두 딸을 보러 갔다. 시내 호텔에서 2주를 지내면서 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코디와도 많이 친해졌다. 딸아이가 매일 코디를 데리고 호텔로 왔고 다 같이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딸아이가 없는 동안에는 우리가 코디를 살폈는데 그러면서 서로 익숙해졌고 코디의 무의식 속에 우리가 머물렀던 호텔이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다. 우리가 떠난 뒤, 딸아이가 코디를 데리고 산책을 할 때면 코디는 우리가 머물던 호텔 방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이 녀석의 마음속에 아내와 나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게 분명했다는 딸아이의 얘기를 들으니 강아지의 마음도 사람과 다름이 없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기특한 녀석이다. 2주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코디 자신도 딸아이, 그리고 우리 부부와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모양이었다.
1시간여 지나 집에 도착했다. 딸아이 방에 코디를 내려놓았다. 내려놓자마자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비행시간, 차 이동 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는 것이 억울했던지 혼을 빼놓을 정도로 뛰어다닌다. 그래도 뛰어다니기만 할 뿐, 짖지를 않는다. 흥분한 듯 보이지만 겁을 먹거나 낯설어하는 표정은 아닌 듯하다. 새 환경이 불안하면 짖을 텐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질 않으니…
그러면 이곳이 코디에게는 어떻게 느껴질까? 생소한 곳, 그것도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인데 코디에게는 어떻게 그려질까? 무척 궁금하지만 우리가 머물렀던 토론토 호텔처럼 이곳도 코디에게는 제2의 편안한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우선이다. 영특한 녀석이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것이지만…
부산을 떨었고, 설레었고, 안쓰러웠고, 안심이 되었고, 기대로 가득해진 다이내믹 하루가 지나간다. 딸아이는 오랜만에, 코디는 처음으로 접하는 공간에서 밤을 지내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샤워를 해야 하는 룰을 적용해야 한다. 코디도 예외는 아니다. 딸아이와 함께 코디 목욕을 시키는데 목욕을 싫어하는 녀석이 웬일인지 투정 없이 차분하게 응한다. 녀석도 비행시간의 피로를 풀고 싶은 모양이다. 목욕 후 털을 말릴 때의 표정을 보니 무척 가관이다. 마치 시원함을 아는 듯한,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듯한, 주인공이 된 듯한 야릇한 표정이다. 털을 말리고 놓아주니 어찌 알고 딸아이 침대 위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는다. 딸아이에게 빨리 오라고 눈으로 얘기를 하는 듯하다.
이국 땅에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아이와 함께 하면 된다는 표정을 짓고 힘들었던 하루의 시간도 잊어버린 듯하다. 딸아이의 껌딱지처럼 곁에서 잘 지내면 그것이 최고 낙이라는 생각을 하는 듯…
분리불안 장애가 나아지고 있지만 항상 딸아이 곁을 지키는 코디가 기특하다. 그리고 딸아이가 주는 사랑도 그 이상이니 둘의 모습에서 애틋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애틋함 이면에는 딸아이의 슬픔이 있기에 마음이 아파진다. 부모와 떨어져 외로웠던 오랜 시간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인내했던 시간들, 하고 싶은 말들을 삼켰던 시간들에 대한 딸의 마음이 온전히 코디에게 쏟아졌으니… 딸아이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던 마음에 딸아이와 코디의 애틋함이 슬픔으로 느껴진다.
긴 하루, 피로가 몰려올 터이니 오늘 푹 쉬어라, 우리 똥강아지들..
※ 딸아이 관련 이야기에 대해선 '딸아이와 반려견 코디'에 관한 다른 얘기들을 먼저 읽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