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 꽤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사귀는 건가?'

by 박재

‘이제... 사귀는 건가?’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정글짐에서 내려오면서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가만히 서서 어쩔줄 몰라 하고 있는데, 한비가 내 소매를 가볍게 잡았다.


“나 집 가야 해.”

“아.”

나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다줄래?”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그 순간, 한비의 얼굴이 달라 보였다. 내 소매를 붙잡고 있는 손끝도,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도 거절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만지지 않아도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고운 머리카락이 흰 블라우스 어깨 위로 가볍게 흘러내렸고, 단정히 채워진 단추 위로 이어지는 목선은 비율이 좋았다. 아기를 떠올리게 하는 고운 뺨에는 감히 손댈 수 없을 것 같은 선명한 귀함이 스며 있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예쁘다.’ 마치 너무나 당연한 걸, 이제야 깨달은 것처럼.


“응, 가자. 바래다줄게.”
한비가 살짝 뛰어와 내 옆에 붙었다. 기분이 좋았다.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길게 뻗은 전신주들이 도로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사이를 걷고 있는 우리는 서로 그림자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겹쳐서 엉켰다가 분리되었다 반복했다. 이러다 그림자처럼 혹시라도 손이 닿지는 않을까. 괜히 코를 슥 닦으면서, 아직도 손에서 정글짐 철봉 냄새가 나는지 확인했다. 희미하게 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손바닥을 비볐다.


“벌써 다 왔네.”

“그러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둘 다 멈추지 않았다. 한비의 집을 지나쳐 계속 걸었다.


한 바퀴. 그리고 또 한 바퀴.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할지 모르겠어서, 좀 더 천천히 걸어주었다. 여름 저녁 공기에 한비한테서 늘 나던 향기가 섞였다. 별말 없이 그저 걸을 뿐인데,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두근거림과 흥미가 시간을 순식간에 어둑어둑하게 잡아먹었다.


한비와 손등이 살짝 스쳤다. 의도한 건지 몰라 가만히 더 지켜봤다. 이번엔 손가락이 가볍게 닿았다. 그러다 한비가 내 손목을 살며시 감쌌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손끝에 닿은 감촉이 낯설었지만, 시원하고 부드러웠다.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손목을 감싸는 느낌이, 마치 나를 조심스럽게 쥐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지금은 교복 셔츠가 들썩일 정도로 뛴다. 흔들던 팔을 멈추고 잡기 편하게 내주었다. 그런데, 한비는 오래 잡고 있지 않았다. 몇 초 후, 조용히 손을 놓았다. 나는 약간 커진 눈으로 한비를 쳐다보았다.


“이제 나 들어가야 해.”

한비가 말했다.


“응...”

“잘 가.”

“아.”

“응?”

“아니, 내일 꼭 데리러 올게.”
“응.”
한비가 웃으며 답했다. 너무 밝은 웃음이라 어둑해지는데도 환하게 얼굴이 보였다. 예뻤다.


나는 한비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괜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혼자서 피식 웃었다. 입가에는 자꾸 웃음이 맴돌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지만, 그냥... 좋았다. 나는 한 번 가볍게 뛰어보았다. 오늘, 꽤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들려왔다. 우렁찬 매미 소리. 그런데 오늘 밤, 매미 소리는 듣기 싫지 않았다.





<계속, 매주 2편씩 올립니다>

(Image. @ungarophrancesco)

keyword
수, 토 연재
이전 03화#3. 정글짐 꼭대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