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온 한비.
약속대로 한비를 데리러 가려고 조금 일찍 집에서 나왔다. 햇살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고, 골목길에는 아침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남아 있었다. 얼마 걸었다고 등에 땀이 천천히 배어들었다. 그래도 기분만큼은 선선했다.
‘여자친구를 데리러 가는 남자친구.’ 그렇게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떻게 인사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걷다 보니 금세 도착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 오.’ 전날 밤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한비네 집이, 아침 햇살 아래서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2층짜리 단독주택. 대문은 녹 하나 없이 깔끔한 철제 게이트였고, 승용차가 드나들 만큼 넓고 높았다. 담장 위로 보이는 테라스엔 작은 화분들이 줄지어 있었고, 벽면에는 덩굴 식물이 자연스럽게 타고 올랐다. 대문 틈 사이로 보이는 1층 창문은 커다랗고, 유리문 너머 거실은 넓고 환했다. 나는 초인종을 누르려다 말고, 괜히 목덜미를 긁었다.
삐-
“하진아! 일찍 왔네?”
기계음이 들리고 문이 열리더니, 한비가 나왔다.
흰 블라우스에 단정한 치마. 교복을 입었을 뿐인데, 한비한테는 그 교복이 이상하리만치 잘 어울렸다. 나는 전날 대충 의자에 올려놓아 구겨진 셔츠 소매를 한번 쓸어내렸다.
“많이 기다렸어?”
한비가 눈이 부신 듯 손으로 해를 가리며 말했다.
“아니, 방금 왔어.”
“가자!”
한비가 기분 좋게 웃으며 가볍게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나는 한비한테 이렇게 소매를 잡혀 끌리는 것이 참 좋았다.
햇볕이 뜨거웠다. 한비가 가방을 멘 어깨를 한 번 바꿨다. 나는 가방을 들어줄까 싶다가 오버하는 것 같아 그냥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너 원래 여기 살았어?”
걷다가 무심코,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응? 아니. 원래 서울에 살았지.”
“서울?”
“응. 중학교 올라오기 전에 이사 왔어.”
‘서울...’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한비는 별 의미 없이 말한 것 같은데, 나는 그 단어를 쉽게 넘기지 못했다. 주머니에 손을 깊이 넣고, 내 발치를 천천히 쳐다봤다.
학교 근처에 이르렀다. 등교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우리 반 애들이 보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한비와 거리를 조금 벌렸다. 그리고 먼저 걸어갔다.
나는 유난스러운 것은 싫어하기에, 학교에서는 사귀는 것을 티 내지 말자고 했었다. 한비는 살짝 당황스러워했지만 알겠다고 했다. 물론 친한 친구 한 명씩에게는 말하기로 했다.
비밀 연애. 한비와 나는 여느 때처럼 지냈지만, 더 이상 서로의 눈 맞춤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마주치면 눈짓을 보내거나 메롱을 했다. 아니면 책상 아래로 손을 흔들었다. 같은 볼펜을 쓰면서, 일부러 서로의 책상 위에 두고 가기도 했다. 우리만 아는 사소한 장난 같은 것들.
비밀 연애라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렇게 서로 못 본 척하면서도, 은근히 신경 쓰는 건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흥미진진함이었다.
강찬은 내 연애를 눈꼴 시렵다며 모른 척해주었다. 그러면서도 가끔 비꼬듯 말했다.
“야, 너네 그러다 들키는 거 아니냐?”
나는 웃으며 말없이 어깨를 한 번 올렸다.
강찬이 헛웃음을 치더니, 대꾸 없이 엎드렸다.
나는 창밖을 봤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여자애들과 매점에 가는 한비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하이테크 펜을 만지작 거리며,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계속, 매주 2편씩 올립니다>
(Image. @Nishino Min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