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비의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한비는 하진이를 언제부터 좋아했을까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박스들이 거실 한가득 쌓여 있었고, 이모님들은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 먼지를 털어냈다. 매미 우는 소리, 가구를 옮기는 소리, 나무 바닥을 쓸어내는 비질 소리가 한데 섞였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2층의 내 방이 될 곳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밖으로 보이는 길은 아스팔트가 아니라 마른 흙길이었다. 작은 바람에도 가벼운 먼지가 일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입에 갖다 대었다.
서울에서는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작은 개천이 있었고, 그 건너편에는 허름한 슈퍼와 문방구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왔다. 나는 무심코 턱을 괴고 시선을 옮겼다.
해 질 녘, 붉은 햇빛이 흙길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한 소년이 걸어왔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살짝 붙어 있었고, 하얗게 바랜 반팔 티셔츠.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 원래는 하얀 것이었을 낡은 운동화. 손에는 파랗지도 투명하지도 않은 비닐봉지를 하나 들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도 뒤따르고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창가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소년은 별로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신비한 애처럼 느껴졌다. 좀 더 지켜보고 싶어지는 끌림이 있었다.
내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소년은 천천히 걸었다.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한,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가끔 발끝으로 흙을 차기도 하고, 손에 든 비닐봉지를 돌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마치 오래된 풍경화 속 한 장면처럼, 이곳과 어딘가 꼭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그 애가 문방구 앞에서 멈췄다. 잠시 고민하듯 서 있더니, 주머니를 뒤적였다. 접힌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무심코 손으로 창틀을 짚었다. 팔꿈치에 뜨거운 열기가 닿았다.
그 애는 누구일까. 나는 왜 계속 그 애를 보고 있는 걸까. 이상하게도,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내가 처음 주하진을 본 순간이었다.
그 애를 다시 본 건, 개학 날 아침이었다. 교실 문을 열었을 때, 순간적으로 모든 소리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칠판에 붙여진 자리표를 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교실 뒤쪽 창가 자리. 책상에 팔을 괴고 앉아 있던 한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창가 자리. 잠시 시선을 마주친 아이. 그때 알았다. 그 애였다. 며칠 전, 내가 창문 너머로 바라봤던 소년. 해 질 녘 흙길을 따라 걸어왔던 아이. 문방구 앞에서 주머니를 뒤적이던 아이. 비닐봉지를 빙글빙글 돌리던 아이.
나는 볼이 살짝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자리는 그 애의 대각선 앞쪽이었다. 나는 조용히 앉아 가방을 내려놓았다. 교실 안은 웅성거렸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었다. 나는 떠들 친구가 없었다. 가끔씩 나를 힐끗 쳐다보는 애들만 있을 뿐.
나는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다시 그 애 쪽을 바라봤다. 책상에 팔을 괴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교복 셔츠가 주름져 있었고, 소매 끝이 살짝 접혀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학교에서 보니, 그 애는 더더욱 특별할 것 없는 아이였다. 평범한 얼굴. 또래보다 키가 크거나 작지도 않은 몸. 조용하고, 말수도 적고, 존재감이 크지도 않은 아이.
그런데도, 나는 계속 그 애를 보고 있었다.
"야, 주하진!"
누군가 그 애를 불렀다.
나는 그 애의 이름을 혼잣말로 작게 따라 불렀다.
"주하진."
주하진은 친구들과 짧게 몇 마디 나누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 모습이 세상 걱정 없이 참 자유로워 보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가방을 정리하며, 가만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왜 자꾸 신경 쓰이지?"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주하진을 찾기 시작했다.
<계속, 매주 2편씩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