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우정도 다 정리할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책상 위를 타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짱소라’
잠시 망설였지만, 곧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소라야?"
소라는 숨이 차 있었다.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한비야, 너 지금 어디야? 와 시발, 나 지금 진짜 어이없어서 미칠 것 같아. 내가 뭘 본 지 알아?"
나는 가만히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창가로 걸어갔다. 소라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나 아까 학원 가는 길에 주하진 봤어. 근데 그 옆에 누가 있었는지 알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라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홍혜진이었어.“
...역시나.
나는 창문을 살짝 열었다. 에어컨의 시원한 공기가 빠져나가며, 동시에 더운 바람이 훅 밀려들었다.
"걔네 둘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고. 내가 직접 봤어. 근데 주하진 그새끼가 한비 너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피곤해서 집에 간다고 했잖아. 완전 거짓말이었어!"
소라는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창문을 살살 두드리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한비야, 너 이거 그냥 넘어갈 거야? 아니, 난 진짜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뭐? 그냥 넘어간다고?"
나는 쓸데없이 길어지는 대화를 피하고 싶었다.
"아니, 그냥. 알겠어. 말해줘서 고마워, 소라야."
“아니, 너 반응이 왜그래! 주하진 이 새끼 이렇게 놔두면...”
“소라야.”
소라가 말을 멈췄다.
나는 한 박자 쉬고, 조용히 말했다.
“나 괜찮아.”
그 말이 나오고 나서야, 내 감정이 어떤지 확실히 알았다.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뭐?”
소라의 목소리가 순간 흔들렸다.
나는 조금 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괜찮다구. 연락줘서 고마워. 근데, 너도 이제 그만해도 돼.”
소라는 말투에 억울함을 담아 나를 걱정하고 위하는 말들을 했지만, 나는 통화를 끊었다. 뚝. 그 순간 매미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손에서 휴대폰을 내려놓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창밖으로 내다본 골목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창가를 따라 길게 늘어졌다. 소라가 말한 것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별다른 충격은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오히려 더 크게 밀려오는 감정이 있었다. 소라에 대한 감정. 처음엔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주하진과 내 연애를 ‘지켜봐 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건 ‘배려’가 아니라 ‘통제’가 되었다.
소라는 내가 누구와 어울려야 하는지, 어떤 연애를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 애는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고, 스스로 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 집착이 어느순간부터 불편했다. 소라는 나를 ‘지키려’ 한 게 아니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걸러내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그 애의 눈에는, 주하진도, 홍혜진도, 결국 내가 맺는 모든 인간관계가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소라는 나를 가장 이해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틀린 길을 가고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소라 본인은 그 모든 동기가 다 나를 위한 것이라 말할 것도 분명했다.
이제 나는 그 애가 나를 걱정하는 척하며 내 감정을 쥐고 흔드는 걸 바라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소라의 ‘옳고 그름’ 속에서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다시 봤다. 최근 통화 목록에 짱소라(통화 종료)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 이름을 천천히 눌러, 삭제했다.
그리고, 주하진. 나는 눈을 감았다. 주하진의 얼굴을 떠올랐다. 아침마다 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모습. 햇빛 아래에서 미소 짓던 얼굴. 내가 장난스럽게 소매를 잡아당기면, 못 이기는 척 끌려오며 슬쩍 웃던 표정. 나를 바라볼 때 신기하게 반짝이던 눈빛. 그 모든 것들이, 이젠 너무 멀어져 있었다.
나는 다 알고 있었다. 주하진이 변한 것도, 내 사랑을 받으면서 다른 여자애를 그려보고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이제 주하진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모든 감정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구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은 내가 먼저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다할 때까지 끝까지 쏟아부었다. 그러니까, 나는 후회가 없었다.
나는 한참을 서 있다가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그 순간, 희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음이, 이렇게나 씁쓸하고 가벼울 줄은 몰랐다.
<계속, 매주 2편씩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