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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전화로 헤어졌다.

딱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by 박재

한비와의 통화가 끝난지건 3분쯤 지났다. 근데 아직도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화면은 꺼졌고, 손바닥은 땀에 젖었다. 아무 말도 못 했다. 한비가 말하는 내내 고개를 숙인 채, 바닥 패턴을 계속 눈으로 따라갔다.


통화하는 내내 한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모든 게 정리된 목소리로.
“하진아, 나는 너랑 연애하면서 좋은 순간이 많았어.”
“아침에 네가 우리 집 앞에 서 있었던 날들, 내가 먼저 손을 잡았을 때 네가 도망치지 않았던 거, 네가 웃었던 순간들. 다 좋았어. 고마워.”

그리고,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혹시 마지막으로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해도 돼.”


그때, 머릿속이 화끈거렸다. 그 말의 뜻을 나는 알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한 한비의 목소리 안에 숨겨진 조용한 기회. ‘지금이라도 네가 말한다면, 한 번쯤은 들어줄게’ 같은 마지막 선의. 하지만 나는 못했다. 오히려 내 마음속에 퍼진 건 이런 생각이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한 걸까?’


나는 입을 떼다 말고 결국,
“응… 너도… 잘 지내.”
그 말밖에 못 했다. 그 이상은, 도저히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사실, 사과는 할 수 있었다.

‘그날 홍혜진이랑 같이 있었어. 미안.’

단 한 문장이면 됐을 거다. 근데 나는 그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해버리는 순간, 뭔가를 공식처럼 인정하게 될 것 같았다. 바람이었는지 아닌지, 그 경계를 넘는 순간이 무서웠다. 내가 진짜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화끈 거리는 느낌이 사라지니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한비가 나를 좋아해준 건 고마웠다. 내 소매를 잡아 끌어줘서, 펜과 편지, 쪽지를 줘서, 정글짐에 앉아 주고, 어둑해질 때까지 손을 잡고 걸어줘서. 생각해보면, 늘 먼저였던 건 한비였다.


그 애한테 나는 언제나 우선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상처를 줬다. 솔직히, 홍혜진이랑 스터디 한 번 간 게 뭐 그렇게 큰일인가 싶기도 했다. 난 말 안 했을 뿐이다. 묻지 않았으니까. ‘숨긴 게 아니라, 아직 말하지 않았던 것.’ 이 말을 아까 했어야 했을까.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나를 지켰다. 사과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그 정도까진 아닌 사람’으로 남았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남은 건 이상한 정적뿐이었다. 허공에 던지지 못한 말들이 방 안에 맴돌았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덧붙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억울함이 올라왔지만, 이제 아무 의미 없었다.


늘 그랬듯, 한비가 이번에도 뭔가 먼저 해줬으면 어땠을까. 더 웃어줬으면, 더 따뜻하게 안아줬으면. 그러면 내 마음도 다시 살아났을지 모르잖아. 이건 나만의 잘못은 아니다. 사랑은 원래, 그렇게 조금씩 바래는 거니까.


책상 위에 휴대폰을 엎어놓고, 등을 의자에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천장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진짜 이렇게 끝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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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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