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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는 한비니까

‘사랑을 받지 못할 것 같다고, 사랑을 멈출 필요는 없잖아.’

by 박재

나는 주하진을 계속 보았다. 수업이 시작되면 졸린 듯이 눈을 비비고, 공책에 대충 무언가를 끄적이다가 알 수 없는 만화를 그렸다. 쉬는 시간이면 팔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이 좋았다. 큰 소리로 웃지도 않았고, 사람들 틈에서 튀지도 않았다.


어느 날, 체육 시간에 주하진이 농구하는 걸 처음 보았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살짝 붙어 있었고, 목덜미를 타고 흐른 땀이 티셔츠에 스며들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 섰음에도 햇빛이 비스듬히 내려와 그 애의 옆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애를 쳐다보았다.


그날 이후, 주하진을 볼 때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알았다.
‘아, 좋아하는구나.’

그 감정은 조용하고, 당연했다. 마치 원래부터 그래야 했던 것처럼.




고백을 결심한 날, 책상 속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냈다.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볼펜을 들었다. ‘하진아’라고 쓸까, 아니면 그냥 ‘주하진’이라고 부를까. 망설임 끝에, 나온 문장은 간결했다.


‘하진아, 오늘 끝나고 잠깐 볼 수 있을까?’

단 한 줄.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손에 땀이 배지 않게, 손가락 끝으로만 종이를 접었다. 평소 과자봉지를 쪽지처럼 접어 버리던 모양 그대로. 그리고, 하진이의 사물함 안에 살짝 밀어 넣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사물함 문을 닫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며 가슴벽을 두드렸다.


나는 정글짐에서 주하진을 기다렸다. 그 애가 올지, 안 올지. 토끼풀을 뜯으며 수십 번도 넘게 의심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주하진이 보였을 때, 나는 손끝이 시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애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것 같았다.


"나 너 좋아해."

나는 먼저 말을 꺼냈다. 주하진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나는 긴장했다. 그리고, 정글짐 위에서 그 애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 한 번 만나볼래? “


그 순간,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첫 연애에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그 애가 아침마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서 있을 때도, 정처 없이 걷다가 손등이 스치고, 소매를 잡아당길 때 못 이기는 척 끌려오는 것도. 모든 게 신기했고, 모든 게 좋았다. 무엇보다, 그 애도 나를 좋아해 준다는 게 가장 기뻤다. 나는 하루 종일 주하진을 떠올렸고, 그 애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를 곱씹었다.

하진이는 웃을 때 참 예뻤다. 특유의 자유로움이 묻어나는 말투와 걸음걸이는 같이 있는 나조차 세상 자유롭게 해주는 마법을 걸어줬다. 이내 확신이 들었다. 사랑에 푹 빠졌다는 것을. 사랑에 빠지면 세상의 모든 것이 흐릿해진다고들 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진이만이 내 눈앞에 선명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었다. 매일 밤, 그에게 어떻게 내 사랑을 설명할까, 어떻게 그 애가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할 수 있을까, 그 벅찬 마음을 붙들고 잠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깨달았다. 하진이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 애는 내 손을 먼저 잡지 않았다. 우리만 아는 사소한 신호들이 줄어들었고,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얼굴도 멀어졌다.


가끔씩, 내가 먼저 그 애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애는 나를 볼 때, 예전만큼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사랑을 받지 못할 것 같다고, 사랑을 멈출 필요는 없잖아.’


나는 계산하기 싫었다. 하진에게 사랑을 다 주고 싶었다. 내가 사랑을 다하면, 그 애도 다시 예전처럼 날 바라봐 주지 않을까.

나는 한비니까.

나는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나는 계속 사랑하기로 했다.

설령 그 애가 더 이상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다 해도.






<계속, 매주 2편씩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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