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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가 뭘 잘못했는데?

“... 너 지금 이거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게 없는 거 알지?”

by 박재

주하진과 몇 번의 격돌 후 우리는 셋이 함께 있는 일이 드물어졌다. 주하진은 나를 의식하긴 했으나 신경 쓰지 않으려 했고, 나는 대놓고 신경 쓰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러다 결국 터질 게 터졌다.


금요일 오후, 그날은 주하진과 한비가 영화 보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기억해 두었다가 한비에게 데이트 일정을 확인했다.

“한비야. 오늘 주하진이랑 영화 보기로 한 날이지?”

“응... 근데 하진이 오늘 피곤하대. 일찍 들어간다고 했어.”

“아니, 그걸 오늘 갑자기 말했다고? 너무한 거 아냐?”

“아니야, 하진이 요즘 정말로 피곤해해. 집에 일이 좀 있나 봐.”

나는 뭔가 이상했지만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한비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나는 한비를 학원까지 데려다줬다. 그날은 유난히 덥고, 기분 나쁜 바람이 불었다. 나는 매점에서 피크닉을 하나 사 들고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너무도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 주하진.

...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홍혜진이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멀리서 봐도 둘은 ‘같이 온’ 사이였다. 주하진은 어색하게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고, 홍혜진은 편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얼어붙었다.

그리고, 바로 뛰었다. 내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지 못한 채로.


"야, 주하진."

나는 그놈을 불러 세웠다. 피곤해서 일찍 집에 간다는 놈이 한비가 아닌 다른 여자랑 여기서 대체 왜 나란히 걷고 있단 말인가.


주하진이 뒤를 돌아봤다.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 뭐야?"

당황했으면서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며 말했다.

“뭐냐, 우연이냐?”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헛웃음을 삼키지 못했다.

“하, 우연 같은 소리 하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너 오늘 피곤해서 일찍 집에 간다며.”


“어.”

“근데 여기서 뭐 해?”

주하진은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스터디하러 왔지."

스터디? 이 새끼, 지금 이게 정상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서 한 번 더 헛웃음을 뱉었다.

"하- 그럼 한비한테는 왜 집에 간다고 했는데?"


주하진이 나를 빤히 보더니,

재수 없는 얼굴을 쓱 내밀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기가 막힌 말을 했다.


“한비가 물어봤어?”

나는 순간 한 번 더 벙쪘다.


“뭐?”

소리를 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니까 한비가 ‘집에만 있을 거냐’라고 물어봤냐고.”

주하진의 얼굴에는 당황도, 죄책감도 없었다. 오히려 억울하다는 투였다.

“아니잖아. 난 그냥 ‘나 오늘 피곤해’라고 했고, 한비는 ‘응, 그래’ 한 거잖아.”


나는 미친 듯이 어이가 없었다.

"... 너 진짜 제정신이냐?"


주하진은 여전히 담담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너 지금...”

차마 홍혜진을 좋아하고 있냐고 묻지 못했다. 무슨 대답을 듣지 몰라서.


“야, 김소라. 오버하지 마. 그냥 스터디하러 온 거야. 저 위에 딴 애들도 있어.”

“그럼 한비한테 미리 말했어야지.”

“굳이 말해야 돼? 그냥 스터디하러 온 거잖아. 예정에 없다가 갑자기 생긴 약속일뿐이고.”

“너 한비한테도 홍혜진이랑 스터디 갔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럼, 할 수 있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는 주하진을 보며, 나는 순간 깨달았다. 이 좀스런 놈은 말로는 못 이긴다.

“... 너 지금 이거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게 없는 거 알지?”


그러자, 주하진이 갑자기 비웃었다.

“야, 뭔 바람이야. 나 지금 홍혜진이랑 사귀냐? 제발 이상한 꼬투리 잡지 말고 좀 꺼져라.”


“너는 지금 그걸 따질 단계가 아니라, 네가 왜 한비한테 숨겼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숨긴 게 아니라, 아직 말을 안 한 거라고."

나는 진심으로 이 새끼를 패버리고 싶었다.


주하진은 계속 비아냥 거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홍혜진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소라야, 하진아, 싸우지 마.”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죽어도 약해 보이기 싫은데, 너무 화가 나서 목소리가 크게 떨렸다.

“너... 진짜 뻔뻔하다.”

“...”

눈물이 한 방울 흘렀지만 닦지 않았다. 우는 것처럼 보이기 싫었다.


주하진이 한숨을 쉬었다.

“야, 김소라.”

“왜.”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나는 그 질문에 순간 멈칫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 그래. 나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걸까.’


나는 한비를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지금 이 순간, 나는 주하진이라는 이 거지 같은 놈을 이기고 싶을 뿐이었다.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이거... 한비한테 네가 말하기 전에, 내가 다 말할 거야.”


주하진이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나는 지는 게 싫어서, 먼저 돌아섰다. 이내 지나간 눈물 자국이 간지러웠지만 뒤돌아 우는 것 같아 보일까 긁지 않고 참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한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마지막 세 번까지만 전화를 하려고 했다.


받았다.

‘여보세요? 소라야?’





<계속, 주 2회 올립니다>

(Image. Copyright @Strange Happe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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