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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Dec 02. 2023

어머니와 함께 살기(10)

     어머니의 가을겆이, 겨울맞이

오늘 아침 비 오기 전에 무를 뽑아 아이스박스에 저장해야 한다는 어머니 계획에 순종해 제일 큼직한 놈으로 이십여 개 정도를 뽑아 올렸다. 낑낑거리며 세 번에 걸쳐 3층까지 올리는 것이 내 일이다. 오늘은 내가 어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놉이니 불평할 여지가 없다. 원래 주말에 남동생이 와서 도와주기로 했지만 주말부터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보신 어머니가 비님 오시기 전에 무를 다 뽑아 올려야 한다고 결정하셨다.


지금 며칠 째 어머니의 가을걷이가 계속되고 있다. 

첫날은 무 열 개를 뽑아 동치미를 담그셨다. 동치미 담기에 적당한 중간 크기의 무들을 골라 뽑고 커다란 배 네 개를 넣고 밭에서 뽑아 온 쪽파를 얹었다. 그전 날 동치미에 부을 물을 큰 통에다 한 통 끓이셨다.


둘째 날에는 비슷하거나 좀 못 생기고 작은 무들을 일고 여덟 개 뽑아 와 세 개는 채나물을 만들고 나머지는 깍두기를 담그셨다.


그리고 오늘은 젤 크고 좋은 놈들을 뽑아 이파리를 다 제거하고 하나씩 신문지로 감싸 차곡차곡 아이스박스에 담았다. 사실 이 아이스박스를 얻기 위해 지난 일주일 간 어머니는 아침마다 집 동네를 돌아다니며 누가 내놓은 게 없나 찾으셨다. 그러다 너무 늦지 않게(어제) 적당한 것을 세 개 발견해 들고 오셨다. 며칠 동안 어머니는 왜 올해는 아이스박스 내놓은 게 없냐고 걱정이셨다. 택배문화가 융성하고 있는 요즘, 스티로폼 박스들이 흔하디 흔했건만 막상 필요해서 찾으려니 또 그게 쉽지가 않았다.

무청을 말려서 캐나다에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일정 상 어렵기도 했고 어머니의 일감을 늘려줄 게 뻔했기 때문에 포기하였다. 다행히 동네에서 어떤 분이 알뜰히 챙겨 가서 사용한다고 한다. 먹지 못하게 생긴 누렇고, 달팽이가 파먹은 찌끄래기 무청은 어머니가 따로 밭에 널어 말려 거름으로 쓴다고 하신다. 거름이 되라고 밭 한쪽에 모아 놓는 일까지 마치고서야 ‘아이고고’ 비명소리를 내며 허리를 펴신다.


아직 어머니의 무 밭에는 뽑지 않은 무가 꽤 남아 있다. 웬만큼 자란 무들은 아들, 딸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아직도 어린 무로 남아 있는 조그마한 녀석들은 뽑아서 총각김치를 담아볼까 하신다. 손바닥 만한 밭 두 군데에서 나온 무가 이렇게 풍성하게 어머니와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사실 올해는 김장을 하지 않기로 나와 약속을 하셨었다. 

어머니는 일 년에 두 번 김장을 하신다고 했다. 봄에 아버지 기일에 맞춰 김장을 해서 가을까지 먹고 가을에 다음 봄까지 쓸 김치를 담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봄 김장을 한 후 앓아누우셨다가 크게 탈이 나고 응급실까지 가야 했던 전력이 있는 터라 나의 압력에 반 강제로 굴복을 하긴 했다. 그런데 요즘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니 결국 포기한 것은 배추김치 한 가지이고 나머지는 다 하고 계시는 것 같다. 그저 무리가 가지 않게 여러 날에 걸쳐 조금씩 진도를 빼고 계신다. 


어머니의 겨울맞이는 쪽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파 화분과 밭에서 조직적으로 쪽파를 솎아서 파김치와 고들빼기, 열무김치를 담고, 나머지는 더 크게 자라면 김장에 쓸 거고 또 일부는 겨울을 나게 내버려 두어 내년 봄에 뽑아 드실 거라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파를 뽑아낸 자리에 갓을 심겠다고 하셨다. 내가 펄쩍 뛰었다.

      ”김장 안 하기로 해 놓고 뭔 김장용 갓을 심냐고요?”

      “... 잉 그렸지. 김장 안 한다고 혔지. 니가 김장철꺼지 있응게 올해는 김장을 못 허겄구만.”

딸의 힘을 빌어 김장을 좀 수월하게 하겠다 생각할 만도 한데 어머니는 딸을 행여라도 힘들게 할까 봐 조심스러워 김장을 포기하신 셈이다.

       “알았어. 갓은 못 심겠구먼.”

잠시 후 환한 표정으로 어머니가 내게 말한다.

       “옳다, 그 자리에 시금치를 심어야 겄다. 지금 심으면 올해 한 차례는 뽑아 먹을겨. 그라고 두면 내년 봄에 새로 돋아 나니께 그때 또 뽑아서 시금치 나물 해 먹고.”

아직은 땅을 놀리는 게 아무래도 용납되지 않는 어머니가 생각해 낸 신통방통한 대안 덕분에 현관 입구 화단이 깨끗이 갈아 엎어지고 두툼한 두렁에 시금치 씨앗이 뿌려졌다. 그리고 얼마 후 시금치 싹들이 예쁘게도 올라왔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가 내 얼굴까지 번진다. 

       “저렇게 좋으실까…”

(안타깝게도 시금치는 그 후 날씨가 추워진 탓인지 쑥쑥 자라지 못해 올 안에는 어머니 밥상에 오르지 못할 것 같다.)


쪽파를 거두고 그 자리에 시금치 씨를 뿌린 후 어머니의 다음 목표는 표고버섯 말리기였다..

장보기를 도와주는 요양 보호사님에게 부탁해 시장에서 표고버섯 한 관을 사다가 꼭지를 따고 채를 썰어 옥상에 널어 말리더니 곧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 사돈들에게도 선물로 줘야겠다고 한 관을 더 사 오셨다. 내가 돌아갈 때 가져갈 것, 미국에 있는 둘째에게 보낼 것, 사돈에게 선물로 줄 것… 탐스럽고 향긋한 표고버섯이 쨍쨍한 햇볕아래 마르는 것을 보며 어머니와 나의 즐거운 옥상 데이트가 며칠 이어졌다. 

어머니에게는 아침저녁으로 표고버섯을 널고 거둬들이느라고 옥상에 올라가는 시간이 햇살도 받고 운동도 되는 데다 고추잠자리도 보고 고추 포기들도 들여다보는 즐거운 시간이다.

며칠 후 잘 마른 표고버섯을 거둬들여 나눠줄 사람 수대로 비닐봉지에 담아 베란다에 갈무리를 하셨다.

그다음 목표는 도라지 말리기.

어머니는 고질병인 해소기침을 다스리기 위해 오래전부터 도라지 차를 끓여 음용수로 대신해 왔다.

도라지와 오미자, 대추 등을 한 줌 씩 넣고 끓여 식혀서 냉장고에 넣어 놓고 드신다. 

그 도라지를 마련하느라 약 도라지 한 관을 사서 손질을 하고 얇게 썰어 옥상에서 말렸다.

지난 십여 년간 이 도라지 차 덕분에 겨울 찬바람만 불면 찾아오던 심한 기침에 고통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내가 기침을 하는 것만 보면 집에 돌아갈 때 약재를 꼭 사가서 달여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도라지를 쨍한 햇볕 아래 널어놓고 돌아보던 어머니의 눈길이 고추 화분 옆에 머물렀다.

허리를 굽혀 고추를 들여다보던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나를 보는 실눈에 비친 햇빛이 생기 있게 반짝인다.

     “고추가 조랑조랑 달렸네.

   이파리가 단풍이 들었어도 고추는 조랑조랑 달려있어… 잉… 예쁘구먼.”



노랗게 물든 고추 잎이 바닥에 깔리기 시작했건만 마지막 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쁘고 사랑스럽게 햇볕아래 빛나고 있는 ‘조랑조랑’한 고추들이 내 어머니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아 눈이 시리고 가슴이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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