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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Dec 09. 2023

어머니와 함께 살기(11)

    엄마의 소원 두 가지

50여 년 전 어느 섣달 그믐날이었다.

할아버지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텔레비전 앞에 앉으셨다.

곁에는 행랑채에서 기거하며 집안일을 도와주는 젊은 부부의 어린 아들이 함께 했다.

낮에만 해도 온통 떠들썩하던 집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올해 농사일이 끝난 뒤로 인근 여러 마을에 흩어져 사는 아들, 딸, 사위, 장성한 손자들이 연일 찾아와 할아버지 곁에서 시간을 보냈더랬다.

할아버지가 많이 쇠약해져서 걱정이 된 자손들이 한가한 겨울 동안 틈틈이 큰집에 와서 머무르기도 하고 볼 일 보러 오가기도 하였다.

이 방 저 방에 둘러앉아 윷도 놀고, 장기도 두고, 간간이 웃음소리가 크게 들리기도 하였다. 

막걸리 잔을 비우며 내년 농사나 자식들 얘기로 두런거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올해 마지막 날이라 다들 설을 쇠고 오겠다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니 집안이 조용한 게 적막하기까지 하였다.

텔레비전을 보던 할아버지가 주춤거리며 일어나 이부자리를 폈다.


“아, 피곤하구나. 좀 누어야겠다.”


옆에 앉아있던 꼬마는 할아버지의 요 자리를 내주고 방 한 켠으로 물러나 앉았다.

얼마 후 큰며느리가 평소 하던 대로 우유 한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방에 들어왔다.


“아버님, 우유 데워 왔어요. 우유 드시고 주무세요.”


할아버지는 아무 반응이 없다.

이상한 기미를 느낀 며느리가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 

할아버지는 잠든 그대로 세상을 뜨셨다. 향년 90세였다.


어머니의 부친이자 나의 외할아버지의 임종 모습이다.

어머니는 옛날에 알던 ‘용한’ 사주쟁이가 했다는 말을 들려주며 외할아버지의 임종 모습을 내게 자세히 알려주셨다.

그 용한 사주쟁이가 한 말이란, 외할머니는 ‘종시’가 많은데 외할아버지께는 ‘종시’가 없다는 것이다.

(내 노트북이 한자를 입력할 수 없는 형편이라 안타깝다. 한자로 풀 때 ‘끝까지 내내’라는 뜻을 가진 마지막 ‘종’과 이를 ‘시’를 뜻하는 것 같다.) 

어머니에 의하면 종시는 돌아가실 때 그분 곁에 남는 자손을 말한다. 흔히 종시가 많아야 자식 복이 있다고 여겼다.

임종을 지키는 자식이 하나도 없다면 얼마나 쓸쓸한 죽음이겠는가. 

외할머니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시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임종을 한 자식들이 많았는데 외할아버지는 저녁 진지까지 잘 드시고 잠자리에 드신 후 그대로 가셔서 자식들이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 

왜 당신의 부친이 종시 하나 없이 외롭게 세상을 뜰 운명인지 의문을 가졌던 어머니의 수수께끼는 풀렸고, 다행히 부친의 죽음이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그 ‘진짜 용한’ 사주쟁이가 일러준 당신의 운명에 마음을 쓰고 있다.

그 사주쟁이에 의하면 나의 아버지는 임종 시 종시 할 자식이 겨우 하나나 있을까 말까 하고 어머니는 많은 자식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기침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폐암 말기인 것이 밝혀지고 부랴부랴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후 한 달 만에 세상을 뜨셨다.

우리 모두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인 걸 알고 중환자실 면회시간마다 모두들 함께 찾아가 아버지를 들여다보곤 했다.

면회시간 외에 침대를 지키고 있던 사람은 어머니와 미국에서 급히 들어온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가 떠나시던 때는 면회시간이 끝난 후 둘째가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가고 어머니가 혼자 계실 때였다. 

갑자기 맥박과 혈압이 떨어지자 의료진이 달려왔고 당황한 어머니는 둘째에게 전화를 하였다.

둘째는 지금 막 병원에 돌아와 병실로 가고 있다고 하였다. 

둘째가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숨을 거두셨다.

여기까지 ‘용한’ 사주쟁이의 말이 모두 사실로 입증되었으므로 어머니는 당신에 대한 예언도 맞을 거라고 믿고 계신다.

어머니의 걱정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나헌티 종시하는 자식이 많다는 것은 내가 오래 병석에 누워있게 된다는 거 아녀? 아퍼서 제 몸도 못 가누고 오래 누워 있게 되면 어쩐다냐.

나는 니 외할아버지처럼 자는 듯 고통 없이 세상을 떴으면 좋겄는디…” 


아무 고통 없이 편하게 세상과 이별하는 것, 비록 마지막 인사를 못하더라도 자식들에게 병간호의 고통을 안겨주지 않고 조용히 혼자 떠날 수 있는 것… 이것이 어머니의 소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원.

어머니와 얘기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제가 매년 엄마 찾아 한국에 오게 오래오래 사시라고 했더니 벌컥 화를 내셨다. 

“내가 너 오라고 오래오래 살란 말여? 사람이 너무 오래 살면 좋은 꼴을 못 봐. 안 좋은 꼴 보기 전에 가야지. 사램이 갈 때 되면 가야 되는 겨.”

어머니가 말하는 안 좋은 꼴이란 자식들에게 닥칠지 모르는 불행,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식을 앞세우는 것이다.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세상을 뜨는 것이 어머니의 또 다른 소원이다.

결국 어머니에게 남은 소망은 당신의 죽음과 관련된 것들이다.


어머니와 알콩달콩, 티격태격, 함께 살았던 삼 개월이 지나고, 하얀 눈에 덮인 캐나다 내 집으로 돌아왔다.

귀가 안 들리는 어머니가 하루종일 높은 볼륨으로 텔레비전을 켜놓는, 시끄럽고 좁지만 살아있는 것 같은 어머니 집에서 아름답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고요함이 바다처럼 깊이 내려앉은 내 집으로.

어머니와 함께 사는 동안 나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때때로 잊고 진심으로 웃기도 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이 조금은 치유되고 위로 받는 걸 느꼈다. 

한때는 어머니의 자랑이었지만 '시대 탓에' 그 딸에 대한 '큰 꿈'을 접고 오직 더 다치지만 않기를 바라며 마음졸이고 전전긍긍해야 했던 어머니, 40년만에 어머니에게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상을 마주하다 또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떠나는 그  딸에게 어머니는 끝까지 의연하고 용감하게 작별을 고했다.

이제는 다시 혼자 밥상을 마주하고 계시겠지만 항상 그랬듯이 오늘도 혈당 오르지 않게 조심해 가며 달게 생명의 양식을 드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야 조금 알게 된 것 같은 어머니. 

어머니는 탁한 찌개류 보다 맑은 국을 좋아하신다.

어머니는 길을 가다 화단에 핀 꽃을 보면 꼭 들여다보며 ‘하이고 예뻐라’ 하며 감탄하신다. 

어머니는 하루 중 이른 아침 밭에 나가는 시간을 제일 좋아하신다. 씨를 뿌리고 생명이 움트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아직도 신기해하며 감탄하며 즐기고 계신다.

뉴스와 날씨예보와 사극을 거르지 않고 보신다. 뉴스마다 나름의 비판을 하며 특히 드라마는 재창작을 하신다.

구순의 나이에도 반상회에 나가 일처리에 대한 의견을 내고 그 일을 담당할 대표자를 추천하고 격려하신다. 탁월한 리더십과 현실적인 아이디어로 젊은 이웃들에게 박수를 받으셨다.

자기 자신을 위한 욕망이나 바람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 귀만 좀 잘 들렸으면 좋겠다는 것이 유일한 욕심이랄까. 병원에 가서 의사와 대화할 때 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자식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것을 면구스럽고 한심하다며 하신 말씀이다.

자식들을 위한 욕심도 없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출세를 못하면 못 하는 대로 그저 건강하고 화목하게 살면 그만이라고 하신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현재의 당신의 모습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작은 것, 약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갖고 계신다.

살면서 누구 못지않은 풍파를 겪었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여전히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다.

어머니에게 삶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되었다. 봄날의 맑은 개울물처럼 맑고 빛났던 시절도, 세상의 폭우와 소용돌이를 만나 무서운 흙탕물이 되어 몸부림쳐야 했던 시간도 지나 이제 어머니의 삶은 웬만한 바람도 비도 크게 뒤집지 못할 큰 바다처럼 넓고 깊어진 듯하다.

어머니는 죽음을 냇물이 큰 바다에 이르는 과정처럼 삶이 흘러가면 자연히 도달하게 되는 곳으로 받아들이고 계신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조용히 세상과 하직하고 싶은,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떠나고 싶은 어머니의 소원과 어머니를 홀로 외롭게 떠나게 하고 싶지 않은 딸의 마음이 꼭 충돌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 후년에도… 조금은 더 어머니와 함께 살기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내 마음을 너무 나무라지 않으시면 좋겠다.


[부록]---드라마 다시 쓰기

어머니와 마지막 밤에 드라마 <장희빈>을 보았다.

어머니의 최애 드라마다. <주몽>이 종영되고 <장희빈>을 방영한다는 예고가 나왔을 때 어머니는 심히 흥분하셨다.

달력을 보며 날짜를 기억하셨다. 주연으로 나온 여배우(김혜수)가 그해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얘기도 하셨다. 악역을 하도 잘해서 그랬다고 하셨다.

드라마에서 중전 민 씨와 희빈 장 씨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할 무렵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근데 저 중전이 원래는 그렇게 착하고 얌전한 사람이 아니었대요. 장희빈도 사실은 모함을 받아서 그렇지 실제 중전을 죽이려고 굿을 하거나 주술을 한 것 아니래요.”

어머니가 굳어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말하신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봤어? 나는 그렇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디.”

“조선시대 궁중 역사책이나 이런 거 연구한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내가 본 장희빈은 왜 다 그렇게 나와?”

“그러게요. 사람들이 재미있게 보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쪽 얘기만 뽑아서 드라마를 만드니까 그렇겠지요. ㅎㅎ”


나는 실실 웃으며 또 말했다.

“근데 엄마, 숙종이 장 씨를 만날 때 나이가 20살 안팎이었는데 남자 배우가 너무 늙지 않았어?”(숙종역을 맡은 전광렬의 당시 나이는 42세였다.)

“참말로…”

어머니는 웃음을 참으며 나를 흘겨보았다.


내가 뭐라고 훼방을 놓아도 <장희빈>과 <민 중전>에 대한 어머니의 견해는 흔들림이 없다.

마지막 날 드디어 폐비 민 씨를 복위시키고 환궁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그런데 민 중전이 바로 궁에 들어가지 않고 몇 번이나 어명을 전하러 온 신하들을 돌려보낸다.

민 중전은 장차 보위에 오를 세자와 왕실의 평안을 위해 장 씨가 그대로 중전의 지위에 머물러야 한다는, 참으로 희생적이고 속 깊은 주장으로 모두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민 중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어머니가 그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봐라 야야, 저 중전이 인제 신하들을 뭐라고 나무라는지 아냐?

 아, 나 보고 자꾸 들어오라고만 하면 어쩌냐. 이 내 꼴을 봐라. 내가 이런 차림새로 어떻게 집 밖엘 나가겠느냐. 백성들이 다 볼 것인디. 복식을 제대로 갖춰서 가져와야 내가 나가들 않겄냐, 그라는 거여.”


그리고 얼마 후 제대로 중전의 예복을 갖춰 입은 민 중전이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어머니는 얼굴에 의기양양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봐라 인자 나가지? 암 그래야지. 사램이 자존심이 있지. 그냥 오라고 헌다고 얼씨구나 하며 따라나서면 되겄어? 갖출 건 갖춰야지.”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믿지 못할 만큼 속 깊고 선한 조선시대 교양 높은 사대부집 규수의 모습보다는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챙기고 복식을 챙기는 여인의 모습이 차라리 현실감 있어 보였다.


앞으로도 계속될 어머니의 드라마를 올해는 더 이상 함께 보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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