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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그린 May 25. 2023

나도 쓸모 있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기쁨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봉사활동을 몇 시간 하고 증명서를 받아오면 생활기록부에 반영이 되었던 터라 방학만 되면 어디로 봉사활동을 가야 하나 고민이었다. 되도록 쉽고 빠르게 시간을 채울 수 있는 곳이면 좋았다. 봉사활동의 의미도 모르고 왜 해야 하는지 목적도 없이 시간 때우기만 급급했다. 봉사기관으로 부터 서류만 받으면 되었다. 남을 진정으로 도와주는 행위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놀아야 하는 시간에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이 힘들 나이였다. 봉사활동은 학교 졸업 후 자연스럽게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힘들게 스트리트카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나온 날 은행 계좌개설과 핸드폰 개통을 위해 유학원에 들렸다.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려는데 유학원에서 발룬티어(Volunteer)를 권유했다. 봉사정신이 없었던 나는 봉사라는 영어단어를 미처 외우지 못해 그게 뭐냐고 되물었다.      


“발룬티어가 뭐예요?”

“마라톤, 농구, 하키 등 스포츠에 관련된 발룬티어도 있고요. 큰 행사가 열리면 거기 참석하는 발룬티어도 있었어요. 영어공부도 하고 친구도 사귀려고 많이 참여해요”    

 

유학원 직원은 발룬티어의 뜻을 몰라서 질문한 나의 의도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현재 오픈되어 있는 발룬티어의 종류를 설명했다. 그냥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다양한 행사장에서 내게 배정되는 일들을 하는 것이었다. 원어민들의 삶도 경험할 수 있고,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인 데다가 외국인 친구들도 사귈 수 있는 1석 3조의 절호의 찬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토에 온 지 3일 때 되는 날 영어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발룬티어 신청을 했다. 


오픈되어 있는 발룬티어 중에서 일의 난이도가 쉬울 것 같은 마라톤 행사에 참여 희망한다는 메일을 주최사에 보냈다. 한 달 뒤 답장이 왔다.      

마라톤 주최 측의 메일에는 참여에 대한 감사의 표현과 함께 시간과 모이는 장소, 교통편등 안내되어 있었다. 일요일 아침 7시 30까지 행사장에 도착해야 했다. 

모이는 장소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고, 일요일 이른 오전이라서 지하철 운행도 안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자동차가 없으니 두 발로 걸어갈 수밖에. 일요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지도 한 장을 들고 무작정 걸었다. 

일요일 이른 아침 토론토의 거리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이정표를 확인하는 일을 영어공부한다고 생각하고 방향을 잃지 않으려고 열심히 눈을 움직였다.

 1시간 정도 걸었을까. 저 언덕 아랫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먼 길을 돌아왔을지언정 결국 길을 잃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잠깐 멈춰 숨을 돌렸다.


참가자 명단을 확인하고 나눠주는 티셔츠를 입었다. 마라톤 하는 날이었는데 아쉽게도 날씨가 안 좋았다. 새벽부터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웠다. 선수들이 완주하는데 적잖은 장애가 될 거란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경기 시작 전 발룬티어들에게 미션이 주어졌다. 

그건 바로 마라토너들에게 물과 게토레이를 나눠주는 일이었다. 

간이 테이블을 일정 간격으로 배치하고 수천 개의 종이컵을 2단으로 쌓아한 테이블 건너 하나씩 물과 게토레이를 따라 놓는 일부터 했다. 이 작업을 영어로 설명해 주는 캐네디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옆사람이 하는 거 보며 눈치껏 따라 했다. 눈치도 실력이겠거니 경기 전부터 주눅 들지 말자 웃자며 마음을 다스렸다. 


주택가 도로에 있는 소화전에 호스를 연결해서 커다란 양동이에 물을 받았다. 게토레이 분말을 넣고 휙휙 저은 후 종이컵에 옮겨 따랐다. 경기 시작 전 큰 테이블에 종이컵을 가지런히 줄 세워 놓아야 했다. 드디어 마라톤이 시작했다는 신호가 울린다. 나와 파트너가 서있던 곳은 출발점으로부터 4km 지점이었다. 언제 선수들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를 서둘러 끝내야 했다. 모두가 주어진 일을 하느라 긴장 상태였다. 

그 순간 멀리서 선수들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한순간에 행사장은 흥분상태가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리를 질렀다.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 날개를 움츠리고 만발의 준비태세를 하고 있다가 올라갈 때가 되었을 때 응집되어 있던 모든 에너지를 순간 발사하고 뛰어오르는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 에너지는 엄청났다. 

선수들에게 물을 나눠주는 테이블을 배정받았다. 달리는 선수들을 향에 크게 소리쳤다. WATER. WATER! 물이라는 한 단어 안에는 “힘내요. 응원해요. 완주해요. 멋있어요.” 등의 수많은 나의 감정이 묻어있었다. 나의 테이블 위 물이 젤 먼저 동이 났다. 내 응원에 반응하고 0.2초 멈춰 종이컵을 픽업하는 선수들의 모습에 나도 흥분이 되었다. 그간 준비하며 추워서 몸을 떨었던 것도, 새벽에 1시간을 걸어온 고생도 다 물과 함께 쓸려나갔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파란색 타이즈를 입은 선수가 쩔뚝거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마라톤에 도전하는 저 선수의 에너지를 순간으로 남기고 싶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던 순간, 나를 본 선수는 내 앞에 잠깐 멈춰 서서 포즈를 다시 잡아줬다. 1등으로 결승선에 들어가고 싶었을 텐데 나에게 내어준 10초의 시간이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 알기에 너무 감사했다.


 마라톤의 참가 의미를 완주에 두고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느냐에 따라 예상치 못한 일도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백인, 흑인, 노인, 아이 다양한 인종과 연령의 사람들이 일요일 오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들이 뛰는 모습을 관중하다 보니 왜 뛰는 걸까? 무엇이 그들을 움직였을까? 그들의 사연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수천 명의 선수들이 지나간 자리엔 수천 개의 종이컵이 도로 위를 뒤덮고 있었다. 마무리 정리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나니 오전 10시 30분이었다. 3시간가량 봉사활동 한 대가로 추최 측의 레터와 스타벅스 커피를 제공받았다. 추웠던 몸이 커피 한 모금에 녹아내렸다. 행사장에서 처음 만난 동생이랑 남은 추위를 달래러 코리아 타운에 순댓국을 먹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순댓국을 먹으면서 우리는 3시간 전의 일을 되새기며 다시 흥분했다. 처음 겪어본 경험이었다. 기대했던 외국인 친구는 만들지 못했지만 아주 꿈 많고 열정 많은 20대 이쁜 동생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크고 작은 자극들을 받고 그것을 통해 색다른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 좋다. 

봉사활동을 참여했던 날 참가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의 내 얼굴만 보아도 얼마큼 가슴이 벅차올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토록 익사이팅한 상황 속에 내가 놓인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았다. 회사와 집을 오고 가며 주어진 임무를 해내는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만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데려다 놓이면 그 모양에 맞춰지고 새로운 상황에 놓이면 그 색깔에 물드는 나를 보면서 나는 이런 사람도 되고 저런 사람도 되는구나를 느꼈다. 순댓국을 먹어서가 아니라 가슴이 그냥 뜨거워졌다. 그날 이후 축구경기와 드래건보트 발룬티어 이외 크고 작은 행사에도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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