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춘향이와 동편제의 고장, 남원땅을 지나며

여원재 ~ 복성이재, 코드명 유전자를 남겨라

by 플랫폼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갑자기 졸음쉼터에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칠흑 하늘을 바라보며 시름속에 갇힌 듯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든다. 언제였더라. 내 마음속에 마루금길이란 걸 꿈꾸기 시작했던 때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빈자리가 마음 한구석에 늘 있었는데. 그렇게 마음치료가 필요했던 나에게,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마루금길.


그렇다면, 과연 그 길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 것일까. 어느덧 마루금길과의 인연도 한달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 길은 첫 시작부터가 뭔지 달랐고 그 길에서라면 뭐든지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의문투성이인 허전함의 정체와 마음의 허기들. 텅텅 비어있던 마음 한구석이 어느날부터 무언가로 채워지기 시작했으니.


이윽고 법정스님이 남기신, 버리고 떠나야 새로운 것들이 비로소 채워진다, 라는 문장을 마음속에 담아두기로 한다. 만물이 생동하는 5월에 첫발을 떼었던 마루금길. 그랬던 난 이제 점점 열기를 뿌려대는 여름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굳어버린 몸의 세포들이 막혔던 산소를 다시 만난듯 갑자기 활기마져 띄기 시작하는 계절. 나의 대간 마루금의 긴여정에 함께할 친구. 그 닉네임을 플랫폼으로 하기로 했다.






플랫폼속엔 기여코 이 길을 완주하고 말겠다는 강한 결기가 한웅큼 담겨져 있다. 일명, 마음 정거장. 마음과 마음이 만나고, 자연과 사람이 소통하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 서로 화합하는 자리. 처음엔 마루금길을 완주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물음표로 시작했다. 그랬던 그 길이 어쩌면 나도 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느낌표로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무념무상으로 쭈욱 걷다보면 언젠가는 쉼표란게 필요할 때도 있을 테고.


그러다 결국엔 대망의 마침표로 종결되지 않을지. 기대감이 솔솔 피어나고 가슴 설레인다. 도둑고양이 담넘듯 고속도로를 쉼없이 달리고 또 달려 도착한 곳은 나의 영원한 만남과 헤어짐의 장소인 신갈간이정류장. 마음이 두근거리고 떨린다. 마루금을 향해 떠나기 직전인 그 정류장엔 벌써부터 수많은 떠남중독증 환자들이 환승열차가 오기만을 마음조리며 기다리고 있는 중.


화려한 아웃도어 복장으로 중무장한 채 행복으로 가는 핑크빛 세상을 꿈꾸며 모두 환한 미소 일색이다. 나도 그 한 모퉁이에 끼여 주체하기 힘든 설렘들을 붙잡고 어쩌다오는 리모진버스 한쪽 귀퉁이에 또 올라탔다. 마루금길이 뭐라고. 이리 사람 마음을 콩닥콩닥하게 만드는 건지.

마루금길 길섶에 외롭게 피어있는 노루발풀이 지친 대간러들을 미소짓게 해준다

눈을 감은채 이런저런 생각에 몰입한다. 이번이 좋은사람들과의 두번째 산행. 조금 반감되긴 했지만 설렘 만큼은 여전하다. 부픈 사연들 가슴에 끌어안고 이내, 깊은 행복감에 취해 설잠에 점점 빠져든다. 2주라는 기다림 후, 이 짜릿함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부푼 기대감이 만면에 교차한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이 기쁨의 정체는 무엇일까.


춘향이와 동편제의 고장
남원땅을 지나며,


내겐, 오랜 숙원이자 굴레처럼 느껴지던 게 몇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관계결핍증. 대인기피증이 발전되어 어느새 마음속 한켠에 똬리를 틀듯 박혀 있는 트라우마. 어느날부터 나에게 모임이란 지옥이 되고 있었다. 자아와 타아 사이엔 존재하는 커다란 마음의 벽에 늘 힘들어하고 부담스러워 했다.


어쩔수 없이 가야할 자리엔 주변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무리수가 늘 존재했고 또, 가끔 심하게 버둥거리기도 했다. 대화대신 애꿎은 알코올만 들이 마시며 허공만 쳐다볼 뿐. 하지만, 그 노력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었던 것.

지각생인 족도리풀, 마치 지나가는 날 향해 미소로 다해준다

사실, 애초부터 결코 오래갈 수 없는 룰이자 불공정한 게임이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누구하나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조차도 없었고 대부분 자신의 잘하는 부분이나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떠들어대는 사이, 난 그저 허공만 맴돌 뿐. 멘탈이 점점 급전직하 중이었다. 난 그져 듣는 척만 할 뿐. 무의식적으로 웃어만 줄 뿐 유체이탈 화법과 유령으로 몇 년을 더 살았다. 영혼없는 말들이 잔뜩 삐뚫어진 내 마음을 변화시켜 줄 리는 만무했다.


한귀로 듣고 다른 한귀로 흘러버리는 상황들이 연이어 계속되었다. 특히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와는 같은 자리에 있기조차 힘들었다.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날 수없이 무너뜨렸고 유리멘탈은 한달간격으로 자주 집을 나가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 인터벌은 갈수록 좁혀져만 갔다. 유체이탈을 경험한 후론 가슴과 심장에 마치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아려오고 저려왔다. 마치 망망대해에 나홀로 표류하고 있는 것처럼 외톨이가 된듯한 이 묘한 기분.


어느새 가고싶은 모임보다 가고싶지 않은 모임이 더 많아져 있었다. 가고 싶지않는 모임에 반강제적으로 간들 별 의미가 없어 보였고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이분법으로 구분지었다. 보고싶지 않는 사람과 보고싶은 사람으로 양분하고 재단했다. 물론, 처음엔 노력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삶을 추구하는 방식이나 방향이 다르긴 했지만 함께 하다보면 언젠간 바뀔 수도 있다, 라고 믿기도 했다. 그마져도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여 떠남중독증 환자들을 가득 실은 리무진버스가 3시간여를 달리고 또 달려 오늘의 들머리인 여원재에 도착했다. 새벽 3시하고도 겨우 5분이 지난 시각. 아직은 어스름이 짙게 깔려있는 새벽녘. 지난번 성삼재보다 한시간여 더 이른 시간이다.


모든게 낮설고 생소했다. 마치 생전 처음 온 장소인 것처럼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아마도 남원땅을 다시 밟은것에 대한 소회가 너무 짙었던 때문이었을까. 인증샷 가볍게 몇 장 남겨두고 어슬렁거리며 서둘러 오늘의 들머리로 향했다.

쌍점줄갈고리나방은 2세를 위한 유전자 남기기위해 여념이 없다

스틱에서 금속성 비슷한 딱딱딱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길섶 대나무 잎새엔 이슬이 송송이 맺혀있었고 풀들은 간밤에 뿌리에서 빨아올린 수많은 물방울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모두 땅을 향해 고개를 쳐박고 있었다. 지난밤 숲이 토해낸 수분들과 신비롭고 베일에 가려진 생명현상들을 바라보며, 난 그져 말은 아끼고 생각 또한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하늘에서 중력의 힘에 의해 슬그머니 내려와 땅속을 흐르다 다시금 나무뿌리와 만나 줄기를 따라 잎을 거쳐 다시 하늘로 오르는 생태계의 에너지 순환을 생각해보니 그만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방인들의 등장에 놀랐는지 부나방들 혼비백산 이리저리 활공하고 있었고, 마을 어귀를 지키는 개들도 무슨영문인지 모른채 허공에 대고 마구마구 짖고 있었다. 밤의 정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마치, 군대행진하는 대간러들의 발자국 소리에 대한 화답같았다.


아니면, 불청객들의 갑작시런 등장에 어깃장이라도 놓으려는 것인지. 한마리가 짖으니 다른 개들도 더욱 거칠게 짖어댔다. 조금 귀에 거슬리고 시끄러웠다. 골목을 벗어나 산길에 접어드니 신기하게도 그 소리가 바뀌었다. 회색도시에서의 소음에서 백색소음으로 전환되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상. 그 접접에선 세상이 완전 뒤바뀐 듯 이름모를 새소리 가득했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뺨치는 소리처럼 들려왔고 우린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가장 나 답다는건 뭘까



지난번, 성삼재~여원재 구간을 마치고 2주일의 시간은 긴긴 기다림의 나날들이었다. 마루금의 소식들이 무엇보다 궁금하고 염려됐다. 몸은 비록 사바세계를 떠돌고 있었지만, 마음은 늘 대간 마루금 속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혹여, 나몰래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는지, 감기라도 걸려 심하게 몸살을 앓고 있는건 아닌지.






갑자기 나다워 진다는건 뭘 뜻하는 걸까, 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연스러움일까. 아니면 자유로움일까. 스토리를 헤집어 보자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까지 십수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내 삶이 베베 꼬인 그 지점. 아마도 대학 4학년때쯤 이었으리라. 우리 집안에 갑자기 큰 우환이 생겼다. 그때의 나로선 감당히기 힘든 커다란 사건이었다.


사건은 점점 내 생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사회가 내놓은 답은 오직 가해자만을 대변하는 것 뿐, 세상을 떠난자는 아무말이 없었다. 과실치사 정도로 적당히 무마되어가는 어설픈 분위기. 죽은자의 입장은 일도 없었고 보는 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회의 눈높이와 내 눈높이 사이에 뭔가 보이지 않는 마의 벽이 존재한다,라는 걸 난, 처음으로 알았다. 우여곡절끝에 졸업이란걸 한 후 난, 사회라는 망망대해에 그냥 내 던져졌다.


내 마음이 삐뚫어지기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을지. 시간은 하염없이 더 지나고 또 흘러갔다. 난, 적절한 치유과정조차도 갖지 못한 채로 관계와의 힘든 싸움을 이어갔다. 계속해서 관계의 응어리는 날 괴롭혔고 급기야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커져 어느새 트라우마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빈자리는 여전했고 멀게만 느껴졌다.

홍줄불나방도 사랑에 빠져있는 중

나만 몰랐다. 관계의 트라우마로부터 난,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아물지 않는 그 아픔들을 그냥 가슴속에 묻어둔 채 결혼이란 것도 했다. 남이 하니까 그냥 했고 결혼생활도 아슬아슬한 외줄타기하듯 결코 무난하진 못했다. 과연, 나 자신을 세상의 모든 기준에 억지로 끼워 맞춘다는게 과연 맞는건지. 나다움을 전혀 무시한 채,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걸 망각한 채 말이다.


그렇게 오늘도 나 다워지는 순간을 또 꿈꾸며 또 떠나는 중이다. 허리를 최대한 낮춘 대간길은 어머니의 포근한 품속처럼 고요하고 평온했다. 굽이치며 흐르던 산줄기가 잠시 숨을 고르기라도 하듯 고을과 고을을 잇는 어느 무명 고갯마루.


유전자를 남기기위한
나방들은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었다


이곳도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하나인 곳이었다. 나방들, 한무리 대간러들의 등장에 혼비백산 달아나는 중이었고, 사랑에 목마른 나방들은 결코 달아날 수 조차도 없었다.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겨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계속해야만하는 숙명을 타고났기에. 순간 미안하고안쓰러웠다. 수행한다는 이유로 자연의 주인공들의 삶을 어지럽히고 있었으니. 엿보고 방해한 것 곧장 사과하고 조용히 그 자릴 서둘러 떠났다.






남원땅을 지나는 마루금은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틀며 키를 한껏 낮추었다. 고남산에 오르니 어스름이 걷히고 그 자리를 한무리 빛이 채워지고 있었다. 내안에 조용히 움트는 작은 빛. 내 내밀한 곳에서부터 샘솟는 한줄기 희미한 빛이 아지랑이 피듯 일렁였다. 세상도 환하게 비추었고 잠시 뒤돌아보니 간밤에 지나온 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불현듯 내 감정의 물살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듯 고요했다. 잔잔함이라기보담 공허함이. 평온함이라기보담 어쩐지 어색하고 무뎌진 칼날처럼 느껴졌다.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지리산의 고봉 준령들이 나보고 잘가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내 두발로 직접 숨가쁘게 걸어왔던 길이 맞는 것인지. 저 산이 이 산같고 저 골이 이 골같고. 마치 산상 음악회에 초대된 것처럼 그냥 마음 편해졌다. 내가 걸어왔던 길이 맞는거라고 막연히 인정하며 또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고남산 정상에서 발아래 펼쳐지는 남원땅을 바라보며 마치 역사스토리텔러라도 된냥 마음 으쓱해졌다. 이성계의 황산대첩의 땅. 동편제의 고향. 성춘향이몽룡의 러브스토리 등 셀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들을 마음속으로 상상하며 걷는다. 남원골 마루금길이 내뱉는 이야기들을 마음껏 회상하며 걷는 길. 그져 춤사위라도 덩실덩실 춰보고 싶은 마음 뿐이다.






어디선가 구슬프게 들려오는 듯한 동편제의 판소리 가락에 맞춰 걷는 길. 행복이 넘실대는 길이다. 통안재 지나 한참의 오르막, 내리막을 거듭한 끝에 다달은 매요마을. 먼저오신 대간러 몇 분들이 동네 정자각에 앉아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간단한 요기를 곁들여가며. 이곳은 오늘 계획했던 거리의 딱 절반 지점이다.

대간러들이 요기하는 틈을 타 살짝 사색모드에도 빠져본다. 앞전 지나왔던 노치마을 60번 지방도. 대간길이 아스팔트로 덮혀버린 그 곳. 걸어오면서 나 또한 아무렇치 않은 듯 지나왔다. 그리고, 이곳 매요마을도 매한가지로 보였다. 마루금 땅을 사람들이 은근슬쩍 점령해 버린 것. 어느순간 마루금이 사람들로 북적대는 마을로 뒤바뀌어 버린것.


우린 어디가 마루금인지 영문조차도 모른채, 이리저리 고삐풀린 망아지 모양 고샅길을 한참을 서성거려야 했고, 또 천신만고끝에 겨우 다시 찾아내기를 반복했다. 우리민족의 정체성인 듬뿍 베인 대간 마루금이 이렇게 길을 잃고 방황케 한건 결국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알듯 말듯 하였다. 단지 캐피탈리즘에 잔뜩 찌들은 자본의 힘이 아니었을까, 라며 그져 추측만 할 뿐.



아막산성은 세월의 흔적을 잊은채
엉겅퀴가
꽃망울을 터트려주고 있었다



돌이켜보건데 알 수 없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으니. 내가 살아왔던 이순의 기간동안 의문투성이의 족적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왜, 가슴속에 그토록 무거운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그리도 힘든 여정을 살아왔던 것인지. 그 때 내가 왜 마음 무너지고 분노하며 자꾸만 좌절을 하게 된 것인지도. 내 마음따라 가지 못하고 바람따라 구름따라 피동적으로 살아야만 했었는지 까지도.






다시금 숲으로 들어갔다. 앞서가던 대간러들의 뒷모습이 웬지 모르게 처량해 보였다. 길은 바람에 나풀거리는 나뭇잎처럼 가볍고 뽀송했고 새파란 하늘아래 살랑이는 잎들이 아름답고 고왔다. 잎들은 곤충들에게 살보시라도 당했던건지 구멍이 송송이 뚫려있었다. 벌레들에게 시달렸을 나무들이 조금 안쓰러웠다. 조그만 미풍에도 나풀거리기를 계속하는 나뭇 잎새들의 수런거리는 소릴 들으며 걷고 또 걸었다.


내림짓에는 두발에 미안했다. 오름짓엔 심장이 버거워했다. 새맥이재를 지나니 다시금 대간은 키를 힘껏 키우는 중이었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음료를 보충해 주기를 여러번 계속한 끝에 가까스로 아막산성에 도착한다. 이곳 산성터에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던 역사의 잔재들이 이곳저곳 널부러져 있었다. 무너진 돌틈사이로 피어올린 엉겅퀴가 그 세월의 숱한 이야기를 전하려는 듯 고운 꽃망울을 터트려주고 있었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물고 물리는 쟁탈전. 무엇을 위해 치고 박고 싸웠는지. 엉겅퀴는 알까. 역사가 전하려는 내밀한 이야기들을. 지금도 피비린내가 진동할것 같은 자리에 산뽕나무 몇 그루가 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먹음직스러워 한웅큼 움켜쥐고 목에 넘겨보았다. 오디라고 불리우는 이 정체의 과일들. 새카맣고 작았지만 당도만큼은 최고였다.






다시 머릴 돌려 우리가 가야할 장수땅과 먼 마루금길을 바라보았다. 봉화산이 지척이고 백운산이 두눈에 아른 거린다. 마치 저 멀리 덕유산 고봉준령들이 어서오라 손을 흔드는 듯. 저멀리 모내기가 막 끝이난 들판들도 보였다. 또다시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복성이재로 향했다. 점점 걸음걸이가 무거워지고 지체된다. 어이하여 방랑자로 살아가고 있는것인지 알듯 모를듯 갈수록 아리송해진다. 그져 꿈이 있어 걷고있을 뿐이러고 애둘러댄다.


피로가 쌓이고 쌓여 발걸음이 땅에서 떨어지기를 거부할 무렵, 아슬아슬 현실과 비현실의 셰계의 접점인 복성이재에 내 육신이 닿는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어느 계곡물에라도 풍덩 잠수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바람에 팔랑거리는 어느 리본을 따라 걸었다. 그 리본 바람에 수없이 흔들거리고 마치 어서오라고 우리에게 손짓하는 것처럼 보였다.

산골무꽃, 넌 지금 무슨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거니? 나에게만 조용히 말해줄 수 없어?

드디어 펼쳐진 자그마한 마을. 우리에게 철쭉식당슈퍼는 일곱빛깔무지개였다. 주인장의 맛갈스런 라면과 막걸리로 허기진 배와 목마름을 달랬다. 일품 라면과 막걸리, 일명 산상 진미였다. 쉰내가 진동하는 땀을 벗겨내려 웃옷을 벗어 냉수마차를 했고 이렇게 오늘 하루가 저물어갔다. 오늘 얻은건 무엇이고 잃은건 또 무엇일까.





시간, 정체성. 자아. 트라우마. 자기사랑 등 단어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마음을 치유하고자 했던 이 마루금길에서 점점 유랑자의 삶을 닮아가는 건지도 모를일이었다. 나도 이제 갑자기 음유시인방랑의 삶이 그리워지기라도 했던 걸까. 마음속 곪았던 상처가 점점 아물어가고 내 심장은 이제 정상에 가까운 박동을 시작했다. 나에게 마루금은 진정 치유의 길이자 영혼의 전도사로 거듭나는 중일까.


자연은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의 상처들을 잘 봉합해 주었고 마루금은 내 심장을 콩닥콩닥 잘 뛰게도 해주었다. 걷기는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브리지가 되주었고 다시 내가 일어서고 세상속으로 나아가야할 의미를 주고 있었다. 이 힘으로 계속 좋은사람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염원해 본다. 잔뜩 메말랐던 가슴속에 어느날부터 설레임이란게 은근슬쩍 자리해 있었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데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던 나에게 새삼스럽게 놀랬다. 나름 적응하려 애쓰는 모습에 토닥토닥 해주었다. 혼자인 삶보다 점점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랄까. 그리고, 걷는 일은 내가 주인이되는 삶이라는 것도. 좋은사람들과 난, 과연 앞으로고 쭉 함께 할 수 있을까. 또, 2주간의 기다림이 기대된다.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다. 좋은사람들과 점점 동화되어가는 듯하다. 아담한 단톡방도 하나 개설되었다. 사랑하라, 자아를, 그리고, 이 세상 만물과 나를 세상속으로 다시 나오게한 대간 마루금을. 상경하는 리모진버스 안락의자에 앉아 한동안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행복이 넘실대는 플랫폼의 대간 도전이야기는.


08화, 나에게 마루금이란, 편에서 계속됩니다.


keyword
이전 06화 지리산을 떠나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