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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May 07. 2023

                   초록끈

   사람은 어차피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의 연결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천륜이야 말 그대로 하늘이 주었다지만 바깥사람들과의 인연은 자신이 입혀가는 색깔의 끈으로 이어지면서 그들과 함께 길을 걷는다.

   

   사 년 전 5도 2농의 삶을 시작하며 이 농장에 들어왔을 때 몸집만큼이나 목소리가 큰 옆 농장 최 사장은 우리에게 꽤나 퉁명스러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낯섦은 들어간 사람 쪽에서만 갖게 되는 감정이 아닌 모양이다. 오랫동안 한 곳에서 터를 잡아 살아오고 있는 원주민도 새로 들어온 사람이 낯설어 예민해져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됐다. 몇 대 째 이곳에서 살고 있는 최 사장은 나와 남편이 나누는 작은 소리까지 다 듣고 있었다.

  

 첫날 남편에게 여기 민들레가 있었는데 안 보인다고 하자 민들레한테 발이 달렸나 어디를 갔겠느냐, 누가 그 밭엘 들어가 민들레를 캐갔겠느냐고 그가 울타리 너머로 말을 던졌다. 갑자기 달려들 듯 넘어온 큰 소리에 당황하며 그쪽을 돌아보니 그는 빠르게 곡괭이질만 하고 있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우리가 자기에게 인사를 먼저 하지 않아 기분이 상했나보다.

   

그의 부인은 그와 반대였다. 상냥했고 필요한 농기구가 있으면 빌려 줄 테니 얘기하라며 우리를 챙겨주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아침에 그녀가 최 사장을 데리고 우리 농막으로 와서 커피 한 잔씩을 부탁했다. 물을 끓여 커피를 타서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며 이야기가 이어졌고 뜨거운 커피 잔을 차가운 손으로 감싸 쥐기도 하면서 이야기는 길어졌다. 어색하던 최 사장과 우리의 사이가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연결로 시작된 그곳 사람들과의 인연은 여러 사람에게로 이어졌다. 마늘 심는 법을 물어보러 최 사장네로 온 저 건너 전 씨를 최 사장이 우리 밭으로 데리고 왔다. 그는 뾰족이 올라오고 있는 마늘을 가리키며 전 씨에게 설명해줬다. 나는 차를 끓여 내갔고 밭고랑에 선 채 차를 같이 마시면서 전 씨와도 첫인사를 나누게 됐다.


   옥수수를 따다가 무심코 바라본 저 아래 밭에서 최 사장 부인이 그 밭 여 주인과 이야기중인 것이 보였다. 그들이 나누는 얘기가 궁금해져 옥수수 따던 일을 거두고 그리로 내려갔다. 눈치 없이 불쑥 찾아간 그곳에서 그 농장 여인을 소개 받았다.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과 오가며 인사하고, 지나가다 들르고, 건너오고 내려가 보면서 나누는 정보가 많아졌다.

   말린 녹두 껍질을 쉽게 벗기려면 발로 자근자근 밟아 비비면 되고, 벗겨진 껍질은 키질 몇 번으로 다 날아간다는 얘기며, 장 담글 때 소금의 농도는 ‘어 짜!’ 정도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도 그들에게서 들었다.


   사람에 대한 선입견으로 이웃의 접근을 막던 때가 있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되겠고. 그것은 선의 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웃과의 끈을 스스로 끊어버린 행위였다. 그렇게 자초한 고립으로 한때 나는 얼마나 외로웠던가.

   저이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삶의 행로를 거쳐 왔을까. 나와의 삶이 연결된 고리에서 바라보면 표현되는 말이 거친 어른이라도 연약한 내면이, 자라지 못하고 있는 어린 아이가 보기도 한다.

  

최사장네서 들리는 새벽닭 울음소리에 눈을 뜨고 전씨의 도리깨질 소리에 농막을 나가본다. 어려서부터 키질을 하며 자랐다는 저 아래 여인네로 마실 나가서 나도 어설픈 키질을 해보기도 한다. 그 여인의 비결대로 ‘어 짜’ 정도의 소금농도로 담근 올해 장은 실패 없이 익어 가리라.


   열매는 열지 않으면서 가시만 많은 나무를 캐내고 그 자리에 시금치 씨를 뿌렸다. 머잖아 시금치는 싹을 틔우며 땅 위로 연한 색의 얼굴을 내밀 것이고 초록빛으로 성장할 것이다. 오후에 최 사장 부부가 제비콩 씨앗을 주고 가며 말한다. 저녁 식사는 자기네 농막에서 같이 하자고.


   사 년 전, 그들과 여린 새순으로 시작한 인연의 끈은 튼실해졌다. 텃밭에서 이어간 끈의 색깔을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것은 초록이라고 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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