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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글쓰기 :: 쓰기를 통해 나를 펼치다

나만의 이야기를 펼치는 특별한 과정

by 에메르트리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금요일 저녁 종종 '무비 데이'를 보내는데 그날도 평소처럼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제목은 '라이프 오브 파이'였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10여 년 전 내게 충격을 안겼던 걸로 기억한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은 동물들을 싣고 이민을 떠나는 도중 거센 폭풍우를 만나고 배는 침몰하는데, 혼자 살아남은 파이는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올라타게 된다. 그 배에서 다친 얼룩말과 굶주린 하이에나, 그리고 오랑우탄과 함께 표류하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그저 동물 이야기인 것 같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꽤 오랜 여운과 철학적 사색을 갖게 해준 그런 영화로 기억한다.




이 영화가 아이에게도 어떤 영감을 주었나 보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재밌게 보았는데, 영화가 끝나자마자 아이가 공책을 꺼내 무언가를 막 쓰기 시작했다. 그때가 아이가 '글쓰기'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시점이다.




전문적이지도 않고 생각나는 대로 쓸 뿐이지만, 그 날 이후로 아이는 여러 개의 글을 썼다. 문득 이야기가 떠오른다고 했다. <드래곤의 나라>, <졸라맨 몬스터 탐험대>, <특영공어대>, <전설 동물들과 마법의 세계>, <The Whale Eats Fish> 등과 같은 제목의 글이다.




한 번 쓰기 시작하니 손 아픈 줄도 모르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몰두했다. 창작 글쓰기의 맛을 알아버렸다. 친구들과 놀다가, 영화를 보다가도, 영감을 받으면 거침없이 스토리를 써 나간다. 결론이 없을 때도 많다. 끝까지 쓰지 않았는데 다른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그래도 그냥 내버려둔다. 쓰는 재미를 빼앗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가 쓰는 모습을 보며 문득, 글쓰기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켜서 쓰는 일기는 싫어하면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만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영단어 외울 때 단어 몇 개 썼다고 팔 아프다 하는 아이가 긴 글을 줄줄 써 내려가면서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무엇이 이렇게 아이를 몰두하게 만드는지 궁금했다.




단순히 글을 쓰는 것 같지만, 아이는 글을 쓰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쏟아내는 중이었다. 아이의 창의적인 생각이 글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쓰면서 또 다음 이야기가 생각난다고 한다. 창의적 글쓰기는 아이의 상상력을 펼치는 도구였던 것이다. 이 귀중한 도구만큼은 간섭과 욕심으로 오염시키지 않고, 아이만의 순수한 창작 동력으로 지켜주고 싶다.




글쓰기는 삶의 중요한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쓰지 않을 때는 몰랐다. 떠오르는 걸 글로 쓰기도 하지만, 쓰면서 더 발전된 창의적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아이에게도, 엄마인 나에게도 글쓰기는 생각의 한계를 넘나들게 해주는 소중한 통로이다.








남들이 시켜서 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쓰는 이유'를 체감하기 시작했다. 이 이유를 느끼면서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 번째로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전까지는글쓰기가 상상력을 키워준다는 말이 틀에 박힌 뻔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를 보면서 이 말 뜻을 마음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는 영화를 매개로 글쓰기의 문을 열었고, 본인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방법을 알아냈다.




글을 쓰는 모습을 멀리서 흘깃 쳐다보곤 하는데 쓰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허공을 멍하게 바라볼 때가 있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아이는 창의적 글쓰기를 하는 동안에 온통 그 생각에 빠진 듯했다. 아마 그 순간만큼은 집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 속의 장소에 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여기서 주인공은 어떤 말을 할까?" 같은 상상을 하며 아이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창의적인 세계가 펼쳐지는데, 창의적 글쓰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귀한 경험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로는, 감정을 표현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이다. 평소 대화로는 하지 못하는 말들이 글로는 표현될 때가 있다. 매일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세 줄로 쓰는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올해 꼭 이루고 싶은 것과 그 이유는?', '내가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오늘 장난감을 버리면서 든 생각과 이유는?', '친구에게 들었을 때 기분 좋았던 말은? 그때의 마음은?' 과 같은 질문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단어가 한정적이기도 하고 말이 꼬이기도 한다. 그러나 글로 쓰게 하니 말로는 나오지 않았던 속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감정들을 알아차리고 꺼낼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 것이다. 짧은 한 문장이든, 길게 풀어쓴 글이든 흘러나오는 기분을 담는다. 글에 담긴 아이의 마음을 읽으면서 아이를 더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고 능력을 길러준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글을 쓰면서 자신이 겪은 일이나 감정을 곱씹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스스로 돌아보고 더 나은 길을 찾는 과정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글쓰기는 단순히 기록을 넘어 사고를 확장시키는 도구라는 걸 알게 되면서, 이게 앞으로 미래에 꼭 필요한 능력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창의적 글쓰기는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자신감을 심어준다. 아이가 쓴 글을 보여줄 때마다 나는 감탄한다. 실은 내용이 어떻든 무언가를 써서 보여준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다. 감탄하면서 아이에게 내용에 대해 묻고 다음 내용이 기대된다는 말을 꼭 덧붙인다. 아이는 쑥스러워 하면서도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하는데, 스스로 쓰는 데 자신감을 얻고 있다. 나를 드러내는 것에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아이가 살아가는 데 든든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대인관계 능력을 높여준다. 글은 나와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도 큰 영향을 준다. 글을 통해 아이의 생각을 본다. 주인공이 무엇을 수호하려고 하는지, 등장인물들이 어떤 대화를 하는지를 보면서 아이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글 속의 캐릭터들이 갈등을 만들어내는 장면에서는 아이가 다양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에 대해 이해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직 입체적인 인물을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성격에 따라 하는 행동과 내뱉는 말을 달리하는 것을 보면서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록과 성찰이다. 글을 쓴다는 건, 현재의 나를 기록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꼭 일기가 아닌 창작 이야기라 할지라도, 지금 내 안에서 펼쳐지는 생각을 쓰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 글을 다시 읽으면, 그 안에 담긴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깨닫게 된다. 아이도 종종 예전에 썼던 글을 읽으면서 내가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할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나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창의적인 글쓰기는 마음속 상상력을 끌어내어 세상과 소통하는 특별한 과정이다. 영화 한 편이 트리거가 되어 글쓰기를 시작한 아이처럼, 창의적인 글쓰기는 거창하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창작 세계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영감을 찾는 다양한 활동을 시도해 보자.

창의적인 글은 순간적인 영감에서 시작된다. 아이가 영화를 본 뒤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듯, 삶의 경험과 새로운 자극은 글쓰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아이의 관심을 끌만한 영화나 책을 제공해 주고, 새로운 곳에 여행을 가고,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시간 등을 통해 다양한 자극을 받고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창의력은 일상 속 작은 자극에서 싹을 틔운다.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써보자.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각 잡고 쓸 필요가 없다. 떠오르는 생각을 막힘없이 쏟아내도록 해보자. 완벽할 필요도 없고 문맥이 맞지 않아도 괜찮다.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문장을 편하게 쓸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자. 꼭 교훈 있는 결말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창작은 흐름이니, 그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이어져 나갈 수 있도록 지지해 주면 아이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피드백보다는 응원을 하자.

아이가 쓴 글은 아이의 개성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결과물이다. 더 잘하라는 의도에서라도 판단하고 평가하는 말보다는 글을 쓰는 과정을 응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삐뚤빼뚤 글씨보다 아이디어를,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보다 아이의 생각을 짚어서 응원을 해준다면 아이는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으로 커나갈 것이다.








창의적 글쓰기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연필을 들어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쓰면 그게 바로 창의적 글쓰기다. 그 작은 시작이 아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창의적 글쓰기는 세상에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특별한 과정이다. 아이가 공책 위에 새로운 세계를 써 나갔듯, 우리 모두에게는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창작의 씨앗이 있다. 그 씨앗을 묵혀두지 말고 깨워보자. 몰랐던 아이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자유롭게 쓰고,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는 글쓰기를 삶의 소중한 도구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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