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 선 Jun 11. 2023

사랑도 받아봤어야 줄 줄 안다.

그리고 난 내 사랑을 포기 안 한다.

어렸을 때 "필요했던" 사랑을 못 받은 아이는 자라서 계속 아픈 사랑을 반복하게 된다.

진짜 뭣 같은 굴레다.


그래서 어딘가 깊이 어긋난 듯 계속 아픈 사랑을 반복하는 이 굴레에서 난 벗어나야겠다.


사랑도 받아봤어야 줄 줄 안다. 그래서 "필요했던" 모양의 사랑이라고 특정한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사랑을 줄 줄 아는 것은 정말 아니니까. 아무리 사랑해도, 언제나 상대방이 제일 필요한 사랑을 주진 못 하니까.


여건이 안됬거나 잘못된 교육 방식, 부모 개인의 침체돼 있는 트라우마, 혹은 부모가 서로를 사랑하는 행동들을 많이 보지 못했다면 (부모의 싸움, 이혼, 불륜목격) 사랑하는 법 자체를 못 배웠거나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졌을 테니 아이 역시 다른 사람은 물론, 나 자신을 아끼는 법조차 모르겠지.


만약 A라는 여자아이가 재혼가정에서 정서적으로 방치당해 감정을 배재하는 것에 익숙해진 어른으로 컸다고 치자.

그런 그녀가 엄마가 되었다.

그녀의 애끓는 사랑과는 무관하게 그녀의 아이는 자신의 엄마와 거리감을 느끼며 자랐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 그녀가 자식의 -타인의- 감정을 잘 돌볼 수 있었을까? 높은 확률로 아니라고 장담한다. 그녀의 행동에 따라 아이는 자신의 감정은 억제해야 할 대상, 남들에게 짐이 되는 나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 아이는 나중에 커서:

1. 깊은 감정교류를 깊이 두려워하는 회피형이 되어 상처받기 전에 먼저 상처 줘버리는 사람이 되던가

2. 나의 감정은 보잘것없고 가치 없다는 낮은 자존감에 나를 지속적으로 상처 주는 유해한 관계를 떠나지 못하던가

3. 뒤죽박죽 다 섞여 또 다른 방식으로 이 감정적 방치라는 트라우마를 표현해 낼 것이다.

모두 다 사랑을 하는 데 있어 방해요소로 작용하는 모습으로.

(A, 그녀는 나의 어머니고 이 아이는 나다.)


물론, 여기엔 아버지, 가정환경, 등 다른 요소들이 너무 많기에 아주 단순화한 것이지만, 한마디로 모든 행동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흔히 회피형 인간은 연애할 때 꼭 피하라고 한다. 많이들 불안형 인간은 질리고 피곤하다고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갑과 을. 관계에서 사람을 나누는 이런 시선이 너무 인정 없고 차갑다. 결국 우리 모두 사랑을 못 받아 다친 마음에 아파하는 같은 사람들인데.


"감정이 메마른 회피형 인간"안에 숨겨진 또다시 실망할게 두려워 닫아버린 마음 안에 제발 누군가 따듯함으로 내 의심과 불안을 녹여주길 바라는 그 아이는 누가 사랑해 주는가. 나보다 남을 챙기는 삶을 너무 일찍 살아와 바운더리가 약한 불안형 인간을 그냥 "부담스럽고 숨 막힌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경시되는 것은 너무 슬프지 않나.

아무도 사랑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 모두 사랑이 필요하다.


나 역시 좋은 사랑을 주지 못했었다. 난 그들을 분명 사랑했지만 내가 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할 줄 몰라서, 주질 못했다.


애착손상은 필연적이다 - 아무리 완벽한 부모도 아이에게 아무 상처도 주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 안에 내면아이는 어린 시절 상처받을 그 당시의 내가, 다 자란 나의 무의식에 서식하며 내 행동과 감정, 결정들을 영향 끼친다. 이 아이가 대변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 내 아픔들, 내 욕구 - 우리가 짓밟는 모든 것이다.

이 아이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이 아이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린 이 상처받은 아이가 내 삶의 운전대를 쥐게 두거나 이 아이를 트렁크에 가둬놓는다.

내 안의 욕구, 상처와 사랑을 상징하는 내면아이와의 소통단절은 아픈 사랑의 굴레의 핵심이다.


이 글들은 내가 바라온 사랑을 반드시 주고 또 받겠다고 전념한, 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우리에게 전하는 액션플랜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