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어머니도 암진단을 받으신지 몇년이 지났다. 우리 엄마가 아팠을 때도 친구에게 알게 모르게 의지했었다. 아니, 이 친구와 나는 이것말고도 여러가지 공통점이 많아서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힘이 되주고 있다. 사실,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그냥 늘 묵묵히 힘이 되어줄뿐.
이 친구와 나는 평범한 일상들 중 남들은 이해못할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곤 한다. 그것은 죽음이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 아마 가족분들 중 몸이 아팠던, 아프신 환자가 있거나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이라는 결말로 잃어버리신 분들은 이해하지 않을까 싶다. 평범한 일상에 죽음이란 단어가 바로 눈 앞에 왔음을 느끼는 순간을 겪으면 그 후로 삶은 180도 달라진다.
나도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나서, 수술도 못 할 수도 있다, 너무 늦었다. 등등의 말들을 들었을 때 너무 무서웠다. 엄마와 아빠를 응급실에 두고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앉았을 때의 그 적막감, 공포감, 그 소롬돋는 외로움. 평범하게 따뜻한 온기를 주던 집안 거실이 나를 덮쳐 삼켜버릴것만 같았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집안에 혼자 있기 너무 무서우니 응급실에 같이 가겠다고 하였다. 내가 무섭다는 말을 하자 아빠는 바로 알겠다고 했다. 여전히 기억난다. 간병인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간단히 챙기고 나서 버스를 반대방향으로 탄 그 날 저녁. 혼자서 자책하며 다시 버스를 골라 잡아 탔다. 그날, 너무 외롭고 무서웠는데.
이후로, 우리 엄마는 무사히 항암치료까지 건강히 마쳤지만 나는 그 날 이후로 죽음, 아니 어쩌면 끝에 대한 생각을 자주하곤 한다. 가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악몽을 꾸기도 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 죽음과 상실에 대한 공포가 내 몸을 감쌀때도 있다. 특히나 나는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어서 인지 간혹 가족들에게 연락했을 때 그들의 연락이 닿지 않으면 너무나 무섭다. 그냥 건강히만 잘 있어주길. 소소하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기를 그저 바랄뿐.
삶에 대한 나의 습관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삶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는 엄마가 아픈뒤로 많이 달라졌다. 나는 이전과같이 여전히 운동, 요가, 명상, 코딩을 즐기지만 더 이상 나 스스로를 몰아붙이거나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여전히 내 습관처럼 자리잡았지만 그 걱정을 뒤로하고 현재를 즐기려고 한다. 미래는 알수없지만 현재는 지금 내 곁에 있기에. 과거는 과거일뿐. 미래는 미래일뿐.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그것을 마주하는 나의 태도일뿐이지.
오늘은 운동을 가고싶었지만 감기 기운이 있어 집에서 명상을 했다. 생리전에 약간 울적하기도 해서, 특히나 명상이 필요했었다. 명상을 하면서 명상에 대해 생각했다. 명상이란 것은 내가 "calm"하려고 하는데 목표가 있지 않다. 어느순간부터 명상을 하며 내 잡념을 떨치기를 바랬던 것 같다. 명상은 내 있는그대로의 잡념마저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오늘 생각했다. 그래, 나는 죽음과 끝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구나. 무엇가 끝남에 대한 공포때문에 너무 현재에만 즐기려고 또 현재에 머무르려는 나 스스로의 모습을 강요하고 있구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 마음속 불안의 원인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명상을 하면서 또 눈물을 터뜨렸다. 엄마가 아픈후로 많은 것이 변했구나. 그러나 곧 감사와 행복의 눈물로 바뀌었다. 엄마가 나아서 행복했다. 그리고 너무 감사했다. 오늘은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여름에 한국에 갔을 때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간 것을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저희는 여기서 잘 살게요. 우리 모두 왔다 가는 거지만, 끝이 있지만, 알지만, 그래도 우리 엄마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그러니까 저희 여기서 잘 살게요,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