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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날들 Aug 25. 2024

여름과 가을 사이

가을이 도착했습니다

올여름은 너무 길고 더웠다. 습도 100%의 수중 생활이 반복되자 이럴 거면 사람도 아가미로 호흡하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습식 사우나 안에서 사는 듯 매일 눅진눅진한 기운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보니 마음도 자꾸만 습해졌다. 긴 여름을 견디는 날들. 축축해진 마음을 탈탈 털어 널고 손꼽아 가을을 기다린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조금씩 밤공기에서 청량한 가을 냄새가 난다는 걸. 하늘도 미세하게 더 높고 파랗고 예쁘다. 바람과 햇살 사이, 그 틈 어딘가로 가을이 분명 스며들고 있다. 착실히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게 가을이 잘 도착하고 있다.

언제부턴 인가 계절 중 가을을 가장 좋아하게 됐는데, 친구는 이제 너도 늙었다는 증거라며. 왜 중년이 되면 단풍잎보다 더 빨간 등산복을 입고 단풍나무 아래 모여 사진 찍기를 좋아하게 되는지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 나이가 들면 눈이 노화해서 원색을 선호하게 되는 거야. 칙칙해진 피부색을 가려 조명효과를 얻으려고 빨간색을 선호하게 되는 거고."
"아니야 난 원래부터 빨간색을 안 좋아해"
난색을 표하며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가 단풍 때문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지만 '칙칙한'이란 말은 묘하게 가슴에 꽂혀 잠시 씁쓸했다.

마흔의 문턱을 넘으면 무료사용 기간이 끝나고 여기저기서 고지서가 날아온다. 그동안 무엇을 먹고, 어디에 마음을 쓰며,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 건강도, 일도, 관계도 중간 검진 결과가 통보된다.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분명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물음표만 가득한 나이라는 게, 뚜렷하게 이뤄놓은 것도 없이 아직도 갈 길은 한참이라는 게 조금 허무하다.

그런 나를 닮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나이가 들수록 화려하고 싱그러운 계절보다 차분한 가을이 좋아진 건 사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 너무 유난스럽지도 소란스럽지도 않게 조용히 다가왔다 사라지는 가을. 그 짧은 머무름이 아쉽기도 하고, 적당히 쓸쓸하기도 하고, 그래서 작고 연약하고 흐릿한 것들에도 의미를 붙여주게 하는 계절. 뜨거운 여름과 시린 겨울의 간극을 메우며 그리움을 부르는 온도와 색감을 지닌 가을이 좋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가 애틋해지면서도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해주는 착한 배려도 좋고.

계절과 계절 사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렇게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달큰한 밤공기, 파란 하늘, 조금씩 물드는 잎사귀, 들판의 작은 꽃들, 가을가을한 마음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스며든 가을의 얼굴을 하나씩 발견한다.

언제나 좋은 순간은 찰나여서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당신의 마음에도 '가을'이 잘 도착하기를.

Photo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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