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고 여유로운 2주간의 결혼 휴가를 마치고 준하의 가족들에게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했다. 혼자였던 희서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온라인 예식 전 희서는 준하의 가족과 식사를 같이 하며 축하를 받았었다. 먼 친척조차 없고 부모님도 돌아가신 희서를 위해 식사 자리를 만들면서도 준하가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알았다. 준하의 어머니가 희서의 옆에 앉아 이야기도 많이 건네며 따뜻하게 챙겨 주었는데, 희서는 낯설었지만 축복이라 생각했다.
준하의 어머니는 무척 강인해 보였다. 어떤 일이든 같이 상의해도 좋다며 희서의 등을 도닥여 주셨을 때의 그 든든함도 마음에 강하게 남았다. 희서는 오래전 심장병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창백한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강하고 든든한 언덕에 의지해도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왜 부서질 것 같이 약한 그 순간들이 같이 떠오르는 걸까.
좋은 일 뒤에 따라오는 그늘들, 절망하는 순간들 속에 피어나는 눈물의 꽃 같은 작은 희망들, 그런 시간을 헤치며 꿋꿋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었다. 준하의 집에서의 희망과 동후가 나간 후 텅 비어있는 희서의 집의 공허는 두 개의 다른 세상이 되었다. 미래를 기다리는 준하의 빛 같은 공간, 과거의 그늘 같은 희서의 집이 이상하게도 대비되고 있었다.
봄 꽃이 피어나는 새 학기를 앞두고 항상 긴장하면서도 기대가 더 많은 첫 수업을 앞두고 희서는 자신의 집을 찾았다. 책이 가득했던 위안과 희망의 공간이었다. 가장 중요한 한 학기의 시작, 그 첫 단추를 잘 끼우기 위해 시작하는 희서의 루틴이 시작되는 곳이 희서의 서재였다.
채 다 옮기지 못하고 남겨 두었던 대학 전공 교재를 찾으러 가끔 들르는 곳이 전부가 된 희서의 집에서 책을 들여다보다가 잠시 의자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가 일어났는데 방안이 꿈처럼 너울거리며 어두웠다. 불을 켜려고 일어났다가 갑자기 느릿느릿 움직이는 블랙홀이 손짓하는 입구에 서 있는 것처럼 눈앞이 구불거리며 현기증이 심하게 왔다.
'아, 왜 이러지?'
점점 뜨거워지는 눈을 한 손으로 비비며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여전히 뿌옇게 울렁거리는 벽을 따라 거실로 나가 냉장고를 열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면 정신이 들 것 같았다. 눈도 맑아질 것 같았다. 냉장고를 열자마자 훅 들이치는 냄새가 속을 더 울렁거리게 했다. 다시 화장실로 더듬거리며 들어가 구토를 했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다시 냉장고를 열면 희서의 모든 내장을 다 토해내야 할 것 같이 생각만 해도 비위가 상했다. 한참 동안 어두운 거실 소파 구석에 무릎을 두 팔로 감싸고 앉아 눈이 편해지기를 기다렸다. 울렁거리는 속이 편해지기를 기다리며 갈증을 참고 있었지만 뭘 마신다는 생각만 해도 다시 구역질이 났다.
"희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많이 늦었어."
준하였다. 자정이 다 되도록 집에 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자 희서의 집으로 급히 온 것이었다. 휴대폰도 서재에 두고 거실에서 거의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놓고 소파에 기대 있다가 준하를 보자 줄줄 눈물이 났다. 바깥과 통하는 세상이 닫힌 것만 같았다. 눈을 떠도 바깥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물을 마시려 해도 몸이 받아주지 않았다.
임박해 오는 첫 수업에도 몸이 나아지지 않았다. 불안과 긴장 때문인지 마시고 먹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걱정하던 준하는 그의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흘째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누워만 있던 희서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희서의 손을 꼭 잡았다.
"네게 귀한 손님이 온 것 같구나."
어머니는 강인하고 단호한 문제 해결사 같았다. 당장 주치의를 불러 희서의 팔에 링거를 꽂았다. 정신이 멍한 채로 침대에 누워있던 희서는 흐리고 기운 없는 눈으로 화장실을 더듬거리며 다녀왔다. 어머님의 지시대로 이런저런 검사를 위해 간호사가 혈액과 소변을 채취해 갔다. 희서는 다시 기진맥진하여 잠에 곯아떨어졌다.
하루를 꼬박 자고 일어난 희서는 집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준하가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머니의 축하한다는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아기를 가졌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드디어 가족이 되나 보구나 생각했다. 준하와 희서가 기다리던 기쁜 순간이었다. 힘들게 선물로 온 손님이었다.
준하와 희서의 사랑이 새로운 생명으로 하나가 되어 영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새 생명은 미래를 이어주는 길목으로 와서 기쁨을 주고 있었지만, 희서가 당연하다 여기며 누려왔던 찬란한 눈앞의 색깔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다는 절망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인생은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