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그레이 케이크 한 조각(실은 한조각 반)을 야무지게 비웠다. 몸에 해롭지만 않다면, 살찌지만 않는다면 특히나 큰 치즈 케이크 한판을 혼자서도 그 자리에서 다 먹을 수도 있겠다. 너무 좋아하지만 결국 내 몸을 위해 자제하는 것 중 하나다. 역설적이게도 치즈 케이크의 달달함은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쾌락을 가져다주지만, 먹고나면 결국 내게 유익하지 않다는 건, 내겐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어쩌다 먹는 건 오케이라는 아이러니.
저녁이 주는 그 특유의 고요함, 적막감, 때론 스산함이 좋다. 아침, 저녁 확실히 가을 바람이 분다. 계절의 변화는 어쩜 이토록 잔잔할까. 어쩜 이토록 스며드는 것일까. 가을이 마치 당연한 제 자리를 찾아오는 듯. 무심하게. 찾아오는 것이 가을을 더욱 매력적이게 한다.
삶 그리고 인생도, 사람도 이렇게 바라보면 얼마나 좋을까.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늘 이런 방식으로 아주 작고 사소한 현상에서도 내 사유와 사색은 내 인생 그리고 나로 귀결된다. 테이블에 앉았다. 자기 전 루틴을 마쳤는데 침대방으로 곧장 가지 않고 테이블에 앉았다. 이유는 너무 분명한 것인데, 글쓰기가 하고 싶은 것이다.
살면서 가장 분명하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굴곡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힘들다. 각자 자기만의 고통, 아픔, 상처, 슬픔, 우울이 있다는 것. 나만 힘든게 아니라는 것.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있다는 것. 주어를 나.로 돌리지 않고 우리는. 모두는.이라고 바꾸면 꽤 많은 면에서 위로가 될 때가 있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실은 개인.이 아니라는 것. 개체가 아니라는 것. 실은 하나라는 것. 아주 작고 사소한 행동이, 친절이, 상냥함이, 다정함이 외려 더 큰 감동과 따뜻함 그리고 위로가 되어준다.
나의 작은 친절이, 배려가 타인에게 전달될 때면, 생각지도 못하게 돌아오는 건 더 큰 감동과 따뜻함이다. 나이 들수록 친절함에 대해 수시로. 시시로. 알아차리게 된다. 겸손함은 모든 면에서 이로운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친절함과 겸손함, 감사함은 내게 가을같은 것이다. 잔잔하게 찾아오는 것. 이토록 자연스럽게 차분하고 침착하게 스며드는 것. 정말이지 매일 다짐하는 것 같다. 친절하자. 겸손하자. 감사하자.
조금 더 일찍 지금 알고 있는 걸 알게 되었더라면. 깨닫게 됐더라면. 알아차렸다면. 내 삶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까?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부질없는 생각인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아쉬움과 씁쓸함이 있다. 지나온 내 인생에 대한 씁쓸함이 이제 더는 후회가 아니다. 그 씁쓸함이란 안타까움, 아쉬움, 연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이다.
굴곡없는 인생이 있을까? 실패없는 인생이 있을까? 삶의 굴곡과 실패는 내게 파도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파도, 피할 수 없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날 주저앉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것. 날 성장하게 한다는 것.
굴곡과 실패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잔잔한 파도든, 거세게 몰아치든 결국 같은 물이다. 바다다. 자유롭게 그 파도의 흐름을 읽고 타는 서퍼들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서퍼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지. 이 내맡김. 용기. 내게 그들은 파도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파도와 맞서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파도와 하나가 돼 내맡기는 것. 너와 나는 하나다.라는 자연의 이치, 우주의 이치를 기가막히게 알고 있는 듯하다.
나이 들어간다는 게 무얼까. 내게 나이 들어감이란, 어떤 혹은 엄청난 발견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절로 알게 되는 것들도 있고 직관적으로 알게되는 지혜도 있고 경험을 통한 앎도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때론 드라마틱하게 감탄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어린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의 절로 드러남이었다. 그 드러남은 내가 나를 알때,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할 때, 나와 소통할 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늘 그 자리에, 거기에 있었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 실패는 너무 당연하다는 것. 나는 그 자체로 빛나고 있다는 것. 지난 시절 날 힘들게 했던 부정적인 생각이라는 낡은 습.을 긍정적인 것들로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러니 내.가 보였고 내 삶이 보였다.
갑자기 궁금해져 국어사전을 찾았다. 굴곡 : 1. 이리저리 굽여 꺾여있음. 2. 사람이 살면서 잘되거나 잘 안되거나 하는 일이 번갈아 일어나는 변동.이라고 되어있다. 아는 말도 이따금씩 이런 방식으로 사전을 들이대면 새로운 자극이 된다.
굴곡ㅡ 그 변동은 이제 더는 내게 카오스로 다가오지 않는다. 잘 되거나. 안되거나. 이 또한 음과 양이다.
이참에 삶의 굴곡을 내 나름대로 새로이 정의하고 싶다. 삶의 굴곡 = 삶의 조화다.
내게 삶의 조화는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필연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