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내 삶을 다시 정렬하고 사랑하기 시작한 후부터
종종 스스로에게 했던 말이 있다.
"이렇게 늦게 깨달았구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좀 더 좋았을까. 어땠을까.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야."
그러면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들 사색들 깨닫게 된 것들에 대하여
늦은 깨달음.이라고 이름 붙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떤 사람은 대학시절, 어떤 사람은 20대 초반, 중반, 후반, 서른 즈음...
이런 식으로 각기 자기 삶에 대해 고뇌하고 통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 같다.
이런 류의 삶에 대한 통찰은 필연인 듯.
기필코 한 번은 오는 듯하다.
나의 경우 지리멸렬하게 서른즈음 시작해 서른 후반이 된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
지속해왔다.
정확히 말하면 서른 셋.부터였던 것 같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시작한 시기가.
그래서 이토록 늦게 깨달을 수 있을까.싶을 정도로,
이런 방식일 수 있을까.의 정도로
나는 마치 전쟁 치르듯 초반엔 많이 아파하고 힘들어했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시기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우울이 내 온 몸을 감쌌고 더 이상 일어설 곳도 나아갈 곳도 없는
황무지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방황의 시기였다.
그 방황의 시기를 무사히 잘 지내왔다는 것에 이따금씩 소스라치게 안도할 때가 있다.
지금의 내가 지금의 내 존재 그 자체가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우울과 상처, 슬픔, 외로움, 불안, 고독을 경험하고 극복해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특유의 분위기와 눈빛과 아우라를 사랑한다.
그런 사람을 볼 때면,
나도 너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
초롱초롱하면서도 촉촉한 눈망울로 상대를 바라보곤 한다.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슬펐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몸서리쳤을까.
끝내 그 터널을 빠져나온 그들에게서 나는 나를 본다.
대화로 느낄 수 있다.
깊이가 있다.
말이나, 목소리에서,
단어선택에 있어서, 문장의 조합에 있어서도,
표정에서도, 눈빛에서도,
깊이가 있다.
늦은 깨달음을 사랑하게 됐다.
늦었고 긴 성장의 시간동안 나는 분명 성장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늦은 깨달음으로
나는 이제 눈빛을 보는 사람이 됐다.
예쁘고 잘생김이 아니라,
잘빠진 몸매가 아니라,
외적인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는,
그 사람의 눈빛, 분위기, 아우라에 압도된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멋짐.을 느낀다.
일찍 깨달아서,
삶을 좀 더 쉽게 편안한 방식으로 살았어도 좋았겠다.
그치만 지금의 나는, 그런 편안한 방식이 아니라,
방황과 우울의 방식으로 내게 찾아온 깨달음이라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 자신이 늦게 깨달은 사람이라 그런지,
지식과 경험으로만 점철돼 세상을 잘 사는 사람보다는,
지혜와 경험으로 점철돼 세상을 잘 살 수 있게 된 사람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늦은 깨달음은 내게 필연이었다.
늦은 깨달음은 내게 고독을 선물했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