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장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찾았다. 집 앞 도서관에 있는 책은 오래전 내가 읽었던 책과는 달랐다. 하드커버에 책 두께도 그것의 3배쯤 됐다. 교보에서 구매해 소장했던 적당한 두께의 책은 오리지널보단 생략된 부분이 많이 있었으리라 추측해본다.
몇 년전, 책도 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소한 삶이 내게 척척 들어맞으면서 책도 모조리 정리했다. 알라딘 중고에 팔기도 매도 불가능한 것도 그냥 버려주세요.하고선 그렇게 집에 있는 책을 비웠다. 그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보냈다. 도서관에 가면 언제든 빌려볼 수 있다는 것이 비움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읽어보고 싶은데 도서관에 없는 책이면 교보에서 사서 읽는다.
무튼 문득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날 불렀다. 서른 둘. 기억이 선명하다. 광화문 한 가운데. 높은 고층 빌딩 오피스 회의실에 앉아 읽어내려가던 그 모습. 광화문 사거리가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과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그 모든 걸 온몸으로 감각하고 있는 나 사이의 경계. 니체를 만났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달까. 나는 그 시절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다.
아침 7시 전에 출근해 아직 아무도 오지 않는, 아무 인기척이 없는 곳이어야만 안정됐고 편안했다. 당시 내게 니체의 언어는 어려웠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낯선. 그 어떤 문장도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었다. 마치 죽자사자 달려드는 맹수처럼.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이해하려 애쓴 책도 이게 처음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독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되던 시절이었다. "이 책은 다시 읽어내려가야겠어. 몇 번은 읽어야 이해될까? 내 것으로 체화될까?" 그로부터 6년이 흐른 지금. 어쩌자고 이 책을 꺼내들었까? 무엇이 이토록 위로받고 싶은 걸까?
내가 고전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토록 단순한데, 생각하게 한다. 질문하게 한다.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게 돕는다. 사유의 시선을 높여준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한다. 본질을 체험하게 한다. 결국 자기 자신을, 자기 삶을 사랑하게 한다.
고전작가들과의 만남은 마치 그들이 나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꿈속에서 늦은 밤 촛불 하나 켜고 나무 책상에 앉아 글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제3자처럼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한참이 지난 뒤, 나이 들어가면서 알게 된 것들이, 깨닫게 된 것들이 많아진 이 시점에 읽어내려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내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까? 내게 어떤 또 다른 소름돋음 혹은 황홀경을 느끼게 할까? 그래도 좋고 아니어도 좋고 있는 그대로 발라봄으로 이 책을 읽어내려가다보면 나만의 관점으로 나만의 경험으로 나만의 시선으로 해독될 수 있겠지.하는 마음이 있다.
애써 해석하려 하지 않을 텐데. 실은 어떤 해석도 필요없는 것이다.
삶이 살아지는 것처럼 책도 읽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