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계절
버스를 탔다.
목적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딱히 이유없이 불현듯 사색하기 위해 버스를 탄다.
맨 뒷자리 가운데 자석에 앉았다.
늘어진 유선 이어폰을 꼈다.
Steven Barakatt의 Eternity를 재생했다.
슬픔의 계절동안 이 곡에게서 유독 희망을 보았다.
이 순간 이 곡이 떠오른 것도 분명 이유가 있겠지.
그 시절을 곱씹으며 아파하라는 게 아니란 걸, 후회하라는 게 아니란 걸.
그 슬픔의 계절이 지금의 너로ㅡ 고독의 계절이 오게 했다는 걸 기억하게 하려는 거겠지.
지금 여기 네 안의 빛을 보라. 모든 것에 감사하라.는 깨달음이겠지.
그렇게 슬픔의 계절은 고독의 계절이 되어 돌아왔다.
슬픔과 고독은 하나라는 걸 알아버렸다.
그 시절 방황과 무기력의 방문은 지독한 슬픔의 계절이 되었다.
슬픔은 나를 삼켰다.
길 잃은 연약한 짐승은 홀로 몸부림쳤다.
내 안의 처절한 사투는 영혼까지 무너뜨릴 기세였다.
부서질 듯한,
녹아져 내릴 듯한 비애가 이런 것이구나.란 걸 알게 해줄만한 거친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를 떠올린 것도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슬픔이 나를 삼키던 시절,
나 자신이 삼킨 슬픔이 더 큰 슬픔의 깊은 바다가 되지 않도록.
분명 출구 있는 몸부림이었겠고 내 안의 처절한 사투였을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알아차린다.
다시금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되었다.
불현듯 이 문장이 일었다.
언어라는 세계.
내면의 세계.
신비로운 세계.
경이로운 세계.
내 언어의 세계가 나의 세계라는 걸.
내 언어의 확장은 곧 나의 내면 세계의 확장이란 걸.
사유와 사색은 언어가 되고 글과 말이 된다.
결국엔 모든 것은 하나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분명함과 명징한 진리가 서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 시절 내가 사랑한 고전 작가, 철학자들에게서 어떻게서든 동질감을 느끼고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도 그들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고. 덕분에 질문할 수 있었다고.
수천 년, 수백 년이 지나도 그대들이 고뇌한 인간과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 자연의 이치가 여전히 기가막히게 들어맞고 있다고. 그대들의 언어는, 문학은 질문하게 한다고.
덕분에 내면 깊숙이 침잠하고 부유할 수 있었다고.
이 얼마나 치열하고 처절하고 예리하고 매서운 영혼과의 대화였을지.
이 얼마나 날카롭고 서슬퍼런 고독과 외로움, 진한 사랑의 결과였을지.
실은 고전을 읽을 때 나는 더욱이 확신한다.
혼자가 아니라고.
읽는 순간 그들과 내가 사는 세상은 이질적인 게 아니게 된다.
시공간을 초월한 새로운 문이 열린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그것은 확장을 의미한다.
곡선이 아닌 직선의 만남.
문의 열림.
그들의 언어와 나의 언어의 만남.
그들의 내면 세계와 나의 내면 세게의 만남이다.
나는 왜 이토록 강렬하게 글쓰고 싶은 걸까.
나는 왜 이토록 강렬하게 읽고 싶은 걸까.
나는 왜 이토록 강렬하게 사색하고 사유하고 싶은 걸까.
성장이란, 내면 세계의 확장이자 내면의 질량을 높이는 것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내 안에 피어오르는 지적임, 지혜와 통찰의 영역이 이토록 강렬해지는 것이라면,
다가오는 마흔의 삶이 전혀 두렵지 않다.
삶이 얼마나 더 아름다워 보일까.
알게 된 것들, 깨닫게 된 것들이 일상에 하나씩 하나씩 알알이 박혀 드러날 때.
삶이란, 이런 거였구나!.
경외감과 감사함이 그 알알을 더욱 깊숙이 박히게 하겠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겠지.
나이 들어감이 있으니 젊음이 있었다.
젊음이 있으니 나이 들어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