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벚꽃 보러 갔다가 10km를 뛰었어요.
때는 23년 12월,
어디선가 벚꽃 길 따라 달리는 코스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24년 4월 경주 벚꽃마라톤대회 를 신청했다.
올해는 신청일에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로 참가 인원이 몰렸는데 (그래서 나도 티켓팅에 실패했다..)
24년도까지만 해도 이렇게 신청이 치열하지는 않았다.
인생에 마라톤은 무슨 달리기도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으면서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과 같이 벚꽃 구경한다는 마음으로 경주로 향했다.
PT를 받기는 하지만 헬스장이 아니라 개인 PT샵이어서 러닝머신도 안뛰어봤고,
그렇다고 실외 달리기를 꾸준히 해온 것도 아닌지라 몇 km를 달려야할 지 감도 오지 않았다.
보문호 한 바퀴를 둘러보며 벚꽃을 구경하는 10km 코스가 아름답다는 말에 무작정 10km 코스를 신청했다.
내 인생 첫 러닝이었다.
제대로 된 러닝화도 없어서 당근에서 급하게 15,000원 짜리를 구매했다.
15,000원이면 운동화 아래 쿠션이란게 아예 없는 것 아니냐는 애인의 말에도 그냥 한 번 뛰고 말거니까 생각하며 구매했다.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토요일
하루 전날 경주에 도착해 차를 빌려 근처 포항 바다까지 구경을 다녀왔다.
이 때까지만 해도 마라톤 = 여행
큰 어려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마라톤 당일 날 아침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경주 시내에 집결했다.
집결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단체 티셔츠를 입고 모여 있었다.
흥을 잔뜩 돋우는 사회자의 진행에 맞춰 카운트다운을 하고, 드디어 땡!
서로를 알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뛴다는 생경한 기분에 가슴이 벅차 힘든 줄도 모르고 4km를 내리 달렸다.
경주벚꽃마라톤 코스는 양 쪽으로 벚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져 있어서 뛰는 내내 두 눈에 벚꽃을 한가득 담을 수 있었다.
평소였으면 차로 지나가야하는 거리를 벚나무 아래로 달리며 지나가는 기분은 정말 특별했다.
문제는 4km 부터였다.
슬슬 발 아치 안쪽부터 무릎까지 찌릿찌릿 아파오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인생에 달리기라고는 해본 적도 없고 마라톤 대회에 나오기 전 연습 마저 하지 않았으니.
중간부터는 시작 부스에서 받은 핸드 타올을 발목에 묶고 어거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뛰는 법도, 호흡법도 전혀 모르면서 눈 내릴 때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벚꽃 아래 좋다고 달렸으니 발에 무리가 올 수 밖에 없었다.
남은 6km를 걷다 뛰다, 걷다 뛰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무슨 정신으로 피니시 라인에 들어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온몸의 힘을 짜내 교통 통제가 풀리는 1시간 30분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완주 라인에 들어왔다.
기록이고 뭐고 일단 끝까지 달린 것만으로 기뻤다.
스마트 워치가 보여준 경주벚꽃마라톤 10km 경로
경주 시내에서 출발해 경주 월드를 거쳐, 보문호를 크게 돌아오는 코스
매 순간 숨이 벅차 힘들었지만 눈 앞에는 아름다운 벚꽃이 펼쳐져 있어 천국과 지옥을 실시간으로 오가는 코스였다.
인생에 야외 달리기는 무슨 러닝도 안뛰어봤으면서 무모하게 10km 코스를 도전하다니.
친구들이랑 같이 뛰지 않았다면 절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침 일찍 마라톤을 뛰고 왔더니 숙소에 들어왔을 때의 시간은 기껏해야 10시 남짓.
남정네들은 호텔에 있는 사우나에 몸을 지지러 갔고, 숙소에 남은 사람들은 차례대로 샤워를 하고 꿀 같은 낮잠을 잤다.
달콤한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발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발날부터 복숭아 뼈까지 멍이 들고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아파 죽겠는데도 경주에 왔으니 기어코 놀러나가겠다며 발목보호대를 하고 돌아다녔다.
이제와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인생에서 미련함을 한 스푼만 덜어내면 인생 살이가 조금은 더 쉬워질 것 같은데.
서울로 돌아와서도 자기 전에는 덕지 덕지 파스를 붙이고 잤다.
일주일이 지나도 발이 괜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병원에 갔다.
지금 와서는 과잉진료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만성적으로 아플까 겁이 나 의사가 권유하는대로 CT까지 찍었다.
결과적으로는 과부하로 인해 근육이 놀라고 염증이 생긴 것 뿐이었다.
다행히도 회사 점심 시간에 몇 번 물리치료를 받았더니 발의 통증은 2주 안에 가셨다.
내 인생에 달리기라는 것은 없을 줄 알았는데,
부상을 당했지만서도 벚꽃을 맞으며 달렸던 첫 러닝의 기억이 좋아서 그 이후로 꾸준히 달리고 있다.
무모하게 10km 마라톤 대회로 인생 첫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부상 없이 오랫동안 달리는 방법들을 꼼꼼히 챙겨가며 꾸준히 달리는 러너로 성장했다.
#달리기 #러닝 #러너 #마라톤 #경주벚꽃마라톤 #무릎통증 #발목통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