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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됨됨이kmj Jun 24. 2023

80kg, 육퇴를 즐길 자격

육퇴:육아 퇴근의 줄임말

2018년 11월, 나는 5개월 된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사를 했다. 새집에서의 하루하루는 따뜻하고 조용했다.

낮에는 주로 자장가나 잔잔한 동요를 틀어놓았고, 분유를 먹이고 재우고를 반복했다.

간간히 산책도 즐겼다.

매일 저녁 목욕을 시켰는데, 새하얀 아기를 수건 위에 눕혀놓고 로션을 발라줄 때면 꼬물거리던 손과 발, 그리고 완벽히 나와 연결된 새까만 눈동자는 세상의 시름을 다 잊게 해 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동굴 목소리)

'아름다운 육아 이야기는 잘 들었다 인간이여ㅡ

자... 이제 다른 기억을 꺼낼 시간이다, 거대한 여자여ㅡ'

'여자? 지금 저 부르신 거 맞나요? 일단 여기, 여자는 저 밖에 없는데... 거대한 여자요?!'

장르가 치유물에서 추격복수물로 바뀔뻔한 순간이다.


그랬다. 나는 80kg이었고, 거울이 보기 싫었고, 육아는 생각만큼 아름다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이 빼고 싶었지만, 24시간 독박육아를 하던 나는 잠시도 아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기와 일정거리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홈트를 하는 것도 무리였다.

그러한 사실이 생각이상으로 우울감과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었지만, 아기를 들여다보면 또다시 사랑이 피어올랐다.

그래... 니도 내탓도 아니었던 거다.

그저 갓난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아기에게 집중해야 하는 시기일 뿐이었던 거다.


나는, 갓난아기를 키우는 이때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육퇴의 맛>에 당당히 눈을 뜨기로 결심한다.

아기를 재우고, 설거지 한판과 빨래 널기 한판을 클리어한다. 야심한 밤이 되면, 밤하늘까지 다 먹어치울 기세의 나는 식탁에 앉는다. 식탁의자는 꽤나 튼튼했지만, 내가 자세를 고쳐 앉을 때마다 등받이가 '삐그덕ㅡ' 조용하고 길게 위태로운 소리를 내곤 했다.

괜찮다, 아직 튼튼한 의자가 세 개나 더 있으니까.


밥에 나물을 비벼 한 공기.

풀만 먹고는 내일을 준비할 수 없다...

고기를 적당히 섭취해 준다. 살짝 느끼하다.

좋아하는 컵라면까지 끝내고 나면, 목이 칼칼해 온다.

식도에 연고를 발라주는 느낌으로 마요네즈를 듬뿍 찍어, 촉촉한 오징어와 쥐포로 목을 쓸어내려가 준다. 탄 것은 발암물질이 있다고 하니, 건강을 위해 우아하고 과감하게 잘라내는 것이 팁이다. 이때 육퇴를 알리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곁들이면 신경 세포들이 식탁에 세워둔 넷플릭스 화면을 끄자고 신호를 보내온다.

어허~!

30분더 봐야 한다, 소화는 시켜야 하니까.


지금...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독박육아로 갓난아기를 키우고 계시는 위대한 초보엄마 분들이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오늘부터라도 스스로에게 말해주자.

"오늘도 수고했어. 이제 매일 나에게 퇴근시간을 주자. 그리고 먹고 싶은 것이든 보고 싶은 드라마든, 브런치의 재미난 글이든, 넌 즐길 자격이 있어. 그리고 넌 곧 지금보다 예뻐질 거야. 얼마 남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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