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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니홉 Aug 12. 2024

진정한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가능할까?

상대방의 입장에서 오롯이 생각해 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살면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사자성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상대방의 처지나 입장과 바꾸어서 생각하여 봄'이라는 이 말은 참 너그러운 느낌의 말이다. 아기나 어린이들은 이것을 잘하지 못하지만, 지각이 어느 정도 형성된 성인은 이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도 든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서 성인이 된 어른 말고, 예수나 부처처럼 득도의 경지에 이른 성인만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내 나이 마흔셋을 먹었지만, 아직 '역지사지'가 불가능함을 느끼고, 내 나이 육십, 칠십이 되어도 불가능할 것 같다.


  모든 사람은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들 때에도 자신을 완전히 배제하여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상대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한 가족 사이, 부부 사이라도 어려운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여보와의 대화를 나누면서,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느꼈던 '역지사지'와 관련된 내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하루는 여보가 말을 한다.

  "부모님 관련 일들을 내가 다 챙겨야 해. 부모님 생신, 집안 행사 등. 너무 힘들어!"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데, 그런 일들을 챙길 수 있는 것이 더 감사한 것이 아닌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여보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절대 가질 수가 없다. 나의 여보는 정말 자신이 맏딸로서, 지금 그 순간 그러한 일들을 챙기는 것이 힘들 뿐이다. 나는 온전히 그 상황을 이해하고 위로의 말을 해주면 참 좋은데. 나의 입장을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직장 동료의 남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남편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너무나도 함부로 대한다고 한다. 결혼하고 시아버지에게 막 대하는 남편을 보며, 너무한 것이 아니냐면서 한 마디 했다고 한다. 자신은 그렇게 말할 아버지도 없는데, 살아 계실 때 좀 잘 대해 드려라면서.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의 아버지는 남편이 어렸을 때 아들에게 강압적이고 함부로 하는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그 아들이 어른이 되어 아버지에게 되갚아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의 입장이 다르니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처녀 때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선생님의 아버지는 자상하셨던 분 같다. 딸을 잘 챙기고 끔찍이 아끼셨던 분이셨으리라. 그분의 딸은 아버지를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반면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힘과 압력에 눌려서 살아왔던 남자는 아버지에 대한 정이 없다. 두 사람이 살아오며 겪은 아버지가 다르기에, 자신의 입장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출처; 블로그, 일상

  첫째 아들이 한 마디 한다.

  "학원 다니기 정말 싫어. 학원 좀 빠지고 싶어!"

  그 말을 들은 내 머릿속에는 순간 거부반응이 올라온다. '비싼 학원비를 내며 다니는 것인데, 한 개라도 더 배울 생각을 해야지!' 아들의 학원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에 나의 기분이 팍 상한다.

  "피아노, 영어, 태권도 다 합하면 학원비가 얼마인 줄 아나? 좀 열심히 다녀라!"


  아들의 입장에서는 학원에 대한 생각이 당연히 다르다. 자신이 번 돈이 아니기에 돈 아까운 줄 모른다. 자신이 가고 싶다고 애원해서 가는 학원도 아니다. 그저 매일 다니는 학원이기에 하루 정도 쉬고 싶을 뿐이다. 혹시나 사정이 생겨서 학원을 빠지게 되면 '오예! 재수!'를 외친다. 그런 아들을 온전히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대할 수 없는 나는 소인배이다. 특히 영어학원비는 비싸니까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쫌생이이다.


  둘째 딸이 지금보다 많이 어렸을 때 놀이방에서 모래놀이 세트의 모래를 온 방바닥에 흩뿌려 놓은 적이 있다. 모래놀이 상자를 꺼내더니 한 번, 두 번 삽으로 모래를 던지더니 그것이 재미있는지 계속 삽으로 모래를 퍼서 던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크게 화를 내었다.

  "이거, 이렇게 해 놓으면 누가 치우노? 모래를 바닥에 던지면 돼? 안돼?"

  그 말을 들은 둘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신이 나서 모래를 던졌다. 첫째는 그날 내 모습을 보고 너무나도 무서웠다고 한다.


  나는 애를 돌보는 입장, 방을 청소해야 하는 입장이라 모래가 온 방바닥에 치덕치덕 뿌려지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둘째의 입장에서는 그저 재미있는 놀이일 뿐이다. 모래를 삽으로 퍼서 던져보니 슈웅 날아가서 방바닥에 떨어진다. 모래 던지기가 너무 재미있다. 계속 모래를 던지고 싶다. 그것을 치우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아니 치운다는 개념 자체가 없지 않았을까. 모래로 중력을 실험하는 아기에게 화를 낸 나는 쪼잔한 아빠였다.


출처: 웹, ogqmarket.naver.com

  학교에서 아이 둘이 싸운다. 난 그 둘을 불러서 상황을 들어본다. 서로 상대편이 잘못했다고 말하며 나에게 말한다. 누가 먼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파악하고 둘에게 사과할 부분은 사과를 하도록 한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생각해 보라면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친구를 대하라면서.


  그렇게 지도하는 선생님인 나도 사실 '역지사지'가 안된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역지사지가 안된다. 정말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오롯이 상대방을 이해할 날이 올까? 내 나이가 육십이 넘으면 더욱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온전히 생각할 수 있을까? 그 나이가 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지 싶다. '역지사지'는 교과서에서만 가능한 말이고, 실제 생활에 적용은 불가능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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