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씨가 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술자리에서 오고 간 대화는 지켜지기 어렵다. 맨 정신으로 손가락 걸고 약속해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물며 술자리에서 했던 말들이 정말 실현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우리네 인생살이 중에 '언제 한 번 만나서 밥 한 끼 하자, 한 잔 하자!' 하는 약속이 지켜지기도 어렵지 않은가! 그날 술자리에서는 이런 말들이 오고 갔었다.
교장선생님께서 화두를 던지신다.
"내 친구 중에 독일에서 음악 공부를 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가이드 삼아 우리 유럽 여행 한 번 가볼래?"
"진짜요? 진짜 유럽 여행요?"
"그래. 예전 학교에 있을 때도 한 번 갔다 왔었다. 김밥 싸 먹으면서 에펠탑 보고 왔지."
"우와! 진짜 갈려고요? 누구랑요?"
"되는 사람들 조 맞춰서 가는 거지. 이번 여름 방학에."
정말 생각만 해도 신나는 유럽 여행 이야기를 꺼내신 교장선생님. 아마도 그전에 다녀오신 경험이 있고, 이번 여름 방학에도 한 번 가보시려고 마음먹으신 듯하다.
"유럽 가면 어디 어디를 가고 싶노?"
"저는 프라하요. 예전에 '프라하의 연인' 드라마를 보면서 거기 정말 가보고 싶었거든요."
"저는 스위스요. 맑고 깨끗한 자연을 보고 싶어요. 알프스산도요."
"이번 여름에 한 번 가볼래?"
"우리들끼리요? 진짜요?"
"어. 되는 사람들끼리 해서 가는 거지!"
술자리에서 유럽 여행 관련 이야기를 하며 우린 엄청 들떠 있었다. 이미 술 먹으면서 유럽 한 바퀴를 다 돌아오지 않았나 싶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한 젊은 여선생님, 한NR가 그날 술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다. 지금 부산에서 출발하고 홍콩을 경유하는 독일행 비행기가 있는데, 가격이 괜찮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여서 상의를 했다. 진짜로 유럽 여행을 가는가? 이렇게 비행기 티켓을 끊으면 정말로 가는 것이 아니냐? 그러다가 의중이 모아졌다. 이번 여름 방학 때 유럽 여행을 가자고! 사실 여행 비용도 모두 개인 지출이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직장 동료, 나이도 비슷하지 않는 20대와 40대, 그리고 50대 교장선생님과 친구분. 과연 이 멤버로 유럽 여행을 가면 어떤 모습이 연출될까?
우린 그렇게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왕복 비행기표를 끊었고, 정말로 이번 여름 방학 때 유럽 여행을 가기로 결심하였다. 내 인생의 첫 유럽 여행을 직장 동료들과 가게 되다니! 그것도 교장 선생님과 연구부장님 내외 분과 가게 되다니! 나중에 알고 보니, 총 인원 8명을 맞추기 위하여 인원이 한 명 부족하였는데, 연구부장님의 아내분과 함께 가는 권부장님이 동기라 같이 가기로 하셨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여행 멤버는 50대 2명, 40대 3명, 20대 3명 해서 총 8명으로 꾸려졌다. 이 중 유럽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은 50대 2명뿐이었다.
비행기표는 끊었지만, 여행의 일정, 숙소 등은 아무런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여행이고, 그 당시 유럽 여행 경험을 가진 사람은 우리 일행 중 교장선생님과 친구분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장선생님께서 여행 가는 멤버들을 교장실에 모았다. 우리는 그날 최교수님을 처음 뵈었다. 교장선생님의 친구분이시자, 이번 여행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실 분이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교장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비행기표를 끊고 이번 여행 일정을, 저 친구와 한 번 짜봤어요. 한 번 들어보세요."
최교수님께서 종이를 한 장씩 돌리고 말씀하셨다.
"우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하여, 체코 프라하에 기차로 갔다가 다시 독일로 들어와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해서 돌아오는 일정입니다. 제가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을 고려하여 숙소를 잡아봤어요. 선생님들이시니까 독일에 유대인 포로수용소도 일정에 넣어 봤어요. 그리고 종이 보시고, 해당하는 곳에 가서 구경하고 싶은 것을 추가하면 됩니다."
비행기표를 끊을 때, 8월 13일 수요일 출국, 8월 25일 월요일 입국해서 총 12박 13일의 시간 동안 우리는 유럽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의 일정을 교장선생님과 최교수님께서 거의 다 짜신 것이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을 고려하여 하루하루 숙소를 정하고 예약을 하셨다. 예전에 우리가 말했던 장소를 고려하여 동선을 짜신 것이다. 체코는 렌터카로 들어가는 것이 별로라고 하셨다. 그래서 기차 타고 들어가서 구경하고 나온 다음, 렌터카를 빌려 이동하는 계획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가 모두 이렇게 연결되어 있어서 자동차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실 세계지리 시간에 배워 유럽 각 나라의 위치는 대강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고, 차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렇게 여행의 큰 그림이 그려지고, 각 장소에서 가고 싶은 곳을 하나하나 추가해서 여행 계획을 구체화하였다. 짤츠부르크에 있을 때에는 모차르트 생가, 미라벨정원. 퓌센에 있을 때에는 노이슈반슈타인성. 루체른에 있을 때에는 빈사의 사자상. 하이델베르크에 있을 때에는 하이델베르크성. 이런 식으로 그 숙소에 인접한 관광지를 찾아서 계획을 세웠다. 자동차로 이동하기에 변수가 있으면 계획했던 일정을 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유럽 여행의 하루하루 일정이 완성되었다.
그 후 우리는 유럽 여행을 가기 위한 공부 및 훈련을 하였다. 학교 도서관에 있는 '먼 나라, 이웃나라' 책 중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편을 빌려서 읽어 보았다. 여행을 가면 많이 걸어야 하기에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저녁을 다 같이 먹고 등산을 하기도 했다. 하루는 다 같이 이른 저녁을 먹고 산에 올랐는데, 조부장님께서 다니는 뒷산이라면서 쉽게 생각하고 등산을 했다. 여름이라 해가 길긴 했지만, 날이 어둑어둑해질 즈음, 잘못된 등산로로 하산하여 조부장님 동생분에게 SOS를 외쳐서 그분이 차를 몰고 와서 우리를 구출해 준 적도 있었다.
방학이 시작하고 나서는 한 교실에 모여 다 같이 영화를 보았다. 미라벨정원이 나온다기에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고, 모차르트 생가를 방문하기에 모차르트에 대해 더 알기 위하여 '아마데우스' 영화도 함께 봤다. 이렇게 하루하루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다 같이 식사를 하고, 운동을 하고, 영화를 보고, 공부를 하는 시간들이 새록새록 기억난다. 당시 40대이신 조부장님과 20대인 내가 참 많이 친해진 것 같다. 직장에서 만난 참 귀한 연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