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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해야 Johaeya Jul 05. 2023

왕이시란 말이오

[들개와 노견] 2부 7화 _섬 출신 들개와 도시 출신 노견의 난리동행



이상하게 저 아이한테 마음이 몹시 끌리는군. 저 당돌한 거지 아이가 벌써 좋아지는 것 같아. 저 아이가 그 더러운 패거리에 맞서 병사처럼 얼마나 당당하게 싸웠느냔 말이야! 잠들어 괴로움과 근심이 사라지니 참으로 준수하고 귀엽고 착하게 생겼구나.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1882」




          막 폭풍이 지나고 밤의 바다에 앉았다. 보름을 직전에 둔 달이 지상으로 농롱한 빛을 쏘아 내린다. 달빛이 파도에 쪼개지자 프라이팬에 튀어 오르는 기름처럼 해수면이 톡톡 터진다. 셀 수 없는 달빛이 뭉쳐져 바다에 길을 만들고 그 가운데 망고가 서 있다. 아직 바다의 소리는 웅장하고, 별이 앉은 하늘은 고요하다. 달만큼 살찐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망고가 머리 위에 낮게 뜬 별을 밟고 오른다. 그다음 그 위의 별을 밟고, 또 그 위의 별을 밟아 마지막으로 달을 붙잡고 하늘에 오른다. 달 속에서 망고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자애롭게 웃고 있다......



꿈에서 깬다. 지난밤 가슴줄 전투(*2부 6화 참고)로 완전히 나가떨어진 건지 녀석과 보내는 날 중 가장 단잠을 잤다. 고요한 밤은 진짜 거룩한 밤이다. 가만, 설마 해몽이 있을까 싶은데 정말로 있다. ‘별이나 달을 잡고 하늘에 오르는 꿈은 고관이 되는 출세나 큰 명성을 날리게 될 것이다’ 꿈속에서 주인공은 망고였으니까 그렇다면...... 망대리가 망과장이 되는 것인가. 개꿈이라 치고 이불 밖으로 나온다.






머리를 떨어뜨리며 목장길을 걷는 망고. “출세를 하려면 고개를 빳빳이 들어야지, 망대리!” 구박을 하는데 이놈의 끈질긴 풀 사랑, 채식주의도 아닌 것이 왜 꾸벅꾸벅 절을 하며 풀 속에만 들어가나 싶다. 그런데 가만 보니, 녀석이 이슬에 젖은 풀잎을 혓바닥으로 빨아대느라 바쁘다. 쉽게 물을 구할 방도가 없으니 그동안 이렇게 아침마다 목을 축여온 것이겠지. 순간 시큰한 마음을 애써 누르는데 눈치 없는 우유가 망고 주위를 돌며 왕왕거린다. 목 좀 축이겠다는 동생을 방해하는 형. 심술궂은 형(우유)을 말리며 돌아오는 길에 이번에는 세상 어른스럽던 동생(망고)이 차를 타지 않겠다고 버틴다. 퉁퉁한 궁둥이를 찰싹! 치며 오르자고 해도 버티는 망고, 루바가 가슴줄을 잡고 녀석을 공중으로 붕 떠서 차에 태운다.  



차 타기 싫어ㅣ집에 가기 싫어



루바와 횟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무 공장으로 간다. 망고를 만나기 전, 우연히 망고나무로 만든 테이블에 반해서 집안에 들였던 적이 있었다. 이후 나무를 만나는 일이 좋아서 쉬는 날마다 루바와 찾아가는 곳이다.



망고 테이블을 만난 나무 공장



공장에서 돌아와  망고와 단둘이 저녁 산책을 나선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횟집 앞에 다다르자 돌연 횟집 사장이 망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방언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네, 네.” 그저 대답만 할 뿐. 그런데 고함소리가 갈수록 커지니 집중을 안 할 수가 없다. 요지는, 바닷일을 마치고 낮에는 잠을 자는데 망고가 횟집을 지날 때마다 자기 집 개가 짖어서 숙면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도로가 훤히 보이는 곳에 개를 묶어두고, 지나는 개(망고는 아무 관심이 없다)가 아닌 자기집 개 짖는 소리 때문에 화가난 인간을 어떡해야 할까. 뉘 개가 잘못이오, 물으며 잘잘못을 따지려다가 상호만 대면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오래된 횟집이라 텃세려니 여기고 참는다. ‘맛대가리 없는 우럭 매운탕 내 다시는 먹으러 가나 봐라!’ 속으로 울분을 참는데 그 옛날 셋방살이 단칸방에서 떠드는 자식들을 눈치로 키운 부모님 심정이 이랬을까 싶다. 내 집 없는 것도, 내 도로 없는 것도 모두 내 탓이요. 천덕꾸러기 자식을 보듬듯이 ‘네 잘못 아니야. 힘없고 능력 없는 애미 탓이지’, 라며 애잔하게 망고를 바라본다.



그런데 횟집을 벗어나서 서글픈 부모가 되어 힘없이 걷는데 갑자기 망고가 가던 길을 멈춘다. '왜, 나 대신 싸워주게? 됐어, 싸움 나면 뒷감당할 능력도 없단다, 라는 자조적인 눈빛으로 줄을 당기는데도 굳세게 버티는 망고. 풀도 없는 아스팔트에서 자꾸만 꾸벅꾸벅 고개를 떨군다. 망고를 따라 땅바닥을 보는데 어라, 구겨진 천 원짜리가 떨어져 있다. 돈이? 여기에? 왜? 돈을 집어 드니 뜬금없는 상황에 웃기고, 녀석이 기특하기도 한데. 부모 마음을 어찌 알고 어린놈의 자식이 나를 위로한다. 하지만 망고는 이제 겨우 한 살...... “야, 어린놈의 새키가 돈맛을 알아? 누가 그렇게 가르쳤어!” 국어책을 읽으며(속으로는 좋았다) 돈을 도로 바닥에 내던지는데 망고가 떨어진 돈을 도로 주워 물고 내 종아리를 입으로 툭툭 친다. 자본주의를 아는 우리 강아지. 길바닥에서 배운 것이 그런 것이라면...... “다음에는 더 비싼 거 주워줘, 망고야.” 돌아오는 목장길에 노란색 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순간 흐드러진 꽃잎들이 오만 원권처럼 보인다. "흔들리는 노랑꽃들 속에서 오만 원권 향기가 느껴진 거야~"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에까지 왔다.



자본주의 강아지
흔들리는 오만원꽃잎






          폰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망고의 입양 일자가 다가온다는 문자다. 임시보호 기간도 끝나 가는구나. 출근을 해서 카페 사장에게 갔다. 망고를 포획한 이후 내내 망고의 소식이 궁금했을 이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근황을 전하니 눈물을 훔친다. 형편이 어려워서 고아원에 친자식을 맡긴 부모처럼 망고에게 줄 사료를 사 놓았다고 울먹인다. 떠돌이 개를 '치워줘서' 고맙다던 회사 사장은 (개를 내가 데려갔다는) 소식을 알고 지난밤 먹다 남은 족발 뼈를 챙겨 온다. 이들의 진짜 마음이 어떤 형태이든지 망고를 위하는 마음이 한 조각이라도 더해진다면 좋은 일이다 싶어서 손에 들리는 것들을 챙겨서 집으로 왔다.



퇴근을 하자마자 망고와 둘이서 저녁 산책을 나선다. 이어서 퇴근을 한 루바가 우유를 데리고 산책에 합류한다. “망고야~”하고 저 멀리서 부르는 루바를 보고 반갑다고 달려가는 망고. 나는 순간 망고의 줄을 놓는다. 놓친 것이 아니라 분명, 나는 놓.았.다. ‘어쩌자고!’ 맞은편에 당황한 루바가 일단 망고를 두 팔 벌려 맞이하는데. 스치 듯 안녕, 루바를 비켜가는 망고! 하지만 순식간에 줄 끝을 낚아챈 루바가 흙밭을 구른다. “놓치면 어쩌려고 그래!” 성난 루바. “내가 미쳤었나 봐, 미안해.” 신속하게 사과하는 나. “망고가 반갑다고 달려들거나 날아가는 원반을 물어오는 것이 내 꿈이야” 아련한 눈빛으로 말하니 “원반을 문 상태로 같이 날아가겠지! 지금의 망고는 안 돌아온다고.” 바른말을 하는 루바. “알아, 이르다는 거. 서두르지 않을게.” (라고 말은 하고, 그 밤 인터넷으로 주황색 원반을 주문해서 며칠 뒤 망고집 지붕에 전시해 두었다.)






          망고나무 책상에 앉아서 지난 1년을 돌아본다. 살찐 망고의 사진을 쳐다보고 개와 관련된 글들을 살피는데 인터넷을 뒤지다가 일순간,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놀라서 넋을 놓는다. “루바아~!!!” 사진을 본 루바도 놀란 건 마찬가지, 둘은 서로를 마주본 채 잠시 말을 잃는데.



망고는 제주개



진돗개, 시바견은 들어봤어도 ‘제주개’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사진 속 제주개는 분명 망고였다. 망고가 제주개였어? 혈통 있는 집의 자식이었네. 어쩐지, 길개답지 않은 용변 매너하며, 점점 드러나는 준수한 용모라니. 그것도 모르고 천연암반수를 먹여도 모자랄 판국에 이슬을 먹이고, 궁둥이를 처대고, 가슴줄을 들어서 강제연행을 했네. 이 망할 손바닥. 그동안 누더기로 옷을 바꿔 입고 속세에 온 왕처럼 들판을 유랑하며 신분을 숨겼구나. 험한 소굴을 떠돌며 돈과 악을 경험하고 세상의 이치를 통달했겠지. 낮에 물어다 준 돈도 다 연유가 있었어. 그렇다면 나는...... 책 속에서 왕과 동행하여 고생한 '마일스 헨든'이 되는 것인가? 앞으로 나는 어찌 되는 거지? 유전자 검사를 해서 망고가 제주개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사라져 가는 우리의 명견을 찾게 되겠지. 구수한 대금소리가 방안에 울리는 듯하다가...... 단잠에 들었다.




가짜 왕이 발을 쿵쿵 구르면서 언성을 높였다.

“저분을 건드리면 안 되오.
저분은 왕이시란 말이오!”

왕은 땅바닥에서 채찍을 집어 들더니 피가 줄줄 흐르는 헨든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면서 이렇게 소곤거렸다.

“영국의 에드워드 왕은
그대를 백작에 봉하노라!
.
.
.

대소신료들은 모두 들어라.
이 사람은 짐이 가장 믿고 아끼는 신하 마일스 헨든이다."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1882」




별을 밟고 개들의 왕국에 오른 망고가 왕좌에 앉아서 발 아래의 세상을 내려다본다. 귀하신 몸을 늦게 알아본 미천한 인간인 나는 ‘미처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라며 하늘의 개들을 우러러 납작 엎드렸는데. 그런 나를 근엄하게 보던 망고가 마지막으로 내 어깨에 칼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래서 짐은 이 사람을 켄트 백작에 봉하고
그 지위에 어울리는 금과 토지를 내리겠노라.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1882」




개들의 왕, 망고 6세



때로 꿈은 삶과 같다.






*[들개와 노견]은 총 20화로 매일 오전 10시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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