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아도 비는 그칠 줄 모른다. 고민은 없다. 우산 없이 망고와 아침 산책을 나선다. 망고와 함께한 지 보름, 눈을 비비며 달력의 날짜를 다시 센다.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보름이라니. 오늘도 역시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녀석이 힘으로 넘어뜨리는 쇠봉 대신에 망치로 쇠말뚝을 땅속 깊숙이 박는 루바, 이제 줄이 꼬이거나 쇠봉이 넘어질 일은 없다. 마음에 드는지 망고가 점프를 하며 꼬리를 친다. 천방지축으로 방방 뛰는 녀석에게 뜬금없이 '앉아',를 가르치는 루바. 과연 할까, 싶은데 곧잘 해낸다. 기분 좋은 생일 아침이다.
빗속 산책
저녁 6시, 한 손에 가슴줄을 들고 망고와 우유, 루바까지 다 같이 저녁 산책을 나선다. 오늘은 루바와 협심하여 망고의 목줄을 가슴줄로 바꿔주기로 한 날이다. 녀석이 길을 마구잡이로 앞장설 때마다 목이 조이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주르륵! 가슴줄을 바닥으로 떨어뜨리자 눈이 휘둥그레지는 망고. 우선 리드줄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녀석의 목에 가슴줄을 걸어본다. 순간 포획 올가미가 떠오른 것일까, 기겁하며 피하는 망고. 갈지자로 동네를 누비며 풀숲에 숨었다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가 난리도 아닌데. 녀석과 단둘이 전쟁을 많이 치른 나는 따라 동요하지 않는다. 이때까지는 그랬다.
망고 없다
“일단 망고 힘을 빼놓자!” 루바가 전투를 지휘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제로는 안 할 거야.” 억지로 가슴줄을 채우지는 않겠다는 루바. 나중에 진이 빠져서 얼떨결에 성공하더라도 망고가 스스로 내린 선택으로 편해지고, 인간에 의해 주어진 상황이 꼭 욕과 폭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로울 수도 있다는 경험을 주고 싶은 것이다.
동네 지도에 색칠을 한다면 안 닿은 길이 없을 것이다. 채우다가 만 가슴줄을 목에만 덜렁덜렁 걸고 두 시간째 거부하는 망고. 싸움에 지친 나와 우유는 다리가 다 휘청거리는데. 루바는 망고의 목에 달린 가슴줄을 도로 빼내고 있다. 그런 다음 우유의 목에 걸고 상냥한 서울말로 시범을 보이는 루바. “망고야, 이것 봐, 아무것도 아니야, 형아는 잘하지?” 제 몸뚱이보다 더 긴 가슴줄을 등에 업은 우유가 순간, 망고의 콧구멍까지 다가가서 왕왕 악다구니를 쓴다. ‘그만 버티고 집에 좀 가자, 동생 새키야!’라는 험악한 얼굴이다.
망고가 해녀의 집 앞에서 멈춘다. 저도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따라 정지한 셋. 이대로 포기하나 싶은데, 돌연 루바가 망고를 끌고 바닷물 쪽으로 거칠게 돌진한다! 그 모습은 흡사 ‘가슴줄 하나 못하고 이 거친 세상을 어찌 살래! 그냥 바닷물에 같이 콱 빠져 죽자!’를 말하고 있지만 정작 루바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플랜을 미리 말씀하셔야죠, 장군. 답답한 이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높은 파도와 나란히 들이친다. ‘내 애인이 팔자에도 없던 개 두 마리와 연이 닿아서 생고생만 하다가 저리 생을 마감하는 건가.... 먹고사는 일이 힘에 겨워 가족과 목숨을 끊는 우리네 비극적 가장 중에 한 명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나와 우유도 동반 입수를 해야 하나.'
말려야 하나, 도와야 하나 나는 어쩔 줄을 모르다가 우유를 보고 '우리도 시늉이라도 하자'고 눈짓을 하는데 일심동체를 걷어차고 우유가 줄행랑을 친다. 우유의 리드줄에 바로 제동을 걸자 이때, "바다에 빠질래! 가슴줄 할래!” 저 멀리서 루바의 고함소리가 뭍으로 튕겨져 나온다. 이제는 목줄인지, 가슴줄인지도 헷갈리는 지경. 가슴줄 하나 때문에...... 차마 웃지도 못하겠고 울지도 못하겠다. 더 이상 남은 힘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정말 바다에 빠져 죽는 것보다 가슴줄을 하기로 택한 건지 철커덕, 드디어 망고의 가슴줄에 버클이 채워진다.
바다에 빠질래! 가슴줄 할래!
어느새 깜깜해진 밤, 마지막으로 루바가 망고의 가슴줄을 알맞게 조정한다. 이제야 모든 걸 내려놓은 망고. 녀석을 이토록 움츠러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도 나를 다 기억하지 못하는데 상대의 시간을 어찌 짐작할 수 있을까. 처음 섬에 왔을 때 외진 귤밭 마을에서 선언니를 만났다. 차도 없고 돈도 없이, 반려견과 상처만 데려온 나에게 그녀는 나의 섬생활을 지탱하게 했다. 이후 데면데면 지내던 또 다른 형제인 필오빠가 섬에 찾아와서 나와 함께 여행을 했다. 그리고 훗날 그 두 사람이 인연이 되어 섬에 둥지를 틀었다. 더 미래에 망고를 만날 것도, 그리고 루바와 함께 하리라는 것도 그때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선언니와 필오빠에게서 받은 마지막 생일 선물을 꺼낸다. 태양열 알전구를 현관봉에 주렁주렁 걸어본다. 현관을 밝히는 은은한 불빛...... 그 덕에 밤중에 잠든 망고의 얼굴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다. 끝나도 다 모르는, 기다려봐야 간신히 보이는, 이놈의 감질나는...... 생.
가슴줄 성공
루바와 캔맥주를 부딪친다. 생일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을 위로하는 날인지도 모르겠다. 꽁꽁 얼었던 나를 한 방울씩 녹여준 뜨거운 사람들. 앞으로는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싶다. 축하보다는, 비를 맞고 함께 달리거나 그들의 어두운 곳을 비추어 줘야지. 지금 망고와 나 사이를 밝히는 이 그윽한 불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