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통찰이 곳곳에 드리우다
핸드폰에 부고(訃告)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 있다. 무한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 사이에 시차가 없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 되어 있고 사물화 된 만큼 허구로 느껴지지만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계좌도 찍혀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관성적 질감은 희미한데, 죽은 뒤의 시간의 낯섦은 경험되지 않았어도 뚜렷하다. 이 낯선 시간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평안이나 불안 같은 심정적 세계를 일체 떠난 적막이라면 더욱 좋을 터이다.
애착 가던 것들과 삶을 구성하고 있던 치열하고 졸렬한 조건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풍경은 쓸쓸해도 견딜 만하다. 이것은 속수무책이다.
와인은 현실을 서서히 지우면서 다가온다. 와인의 취기는 비논리적이고 두리뭉실하다. 이 취기는 마음속에 몽롱한 미로를 끝없이 펼쳐 놓는데, 그 미로를 따라가면서 마시다 보면 출구를 찾지 못한다. 와인의 맛은 로맨틱하고, 그 취기의 근본은 목가적이다.
내가 즐겨 마신 술은 위스키다. 위스키의 취기는 논리적이고 명석하다. 위스키를 몇 방울 목구멍으로 넘기면 술은 면도칼로 목구멍을 찢듯이 곧장 내려간다. 그 느낌은 전류와 같다. 위스키를 넘기면,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그 전류의 잔잔한 여파들이 몸속으로 퍼진다. 몸은 이 전류에 저항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인다.
지난 70년 동안 이 불행한 분단의 시대를 지배한 것은 증오와 불신과 저주의 언어였다. 이 언어의 쓰레기들은 판문점에서 쌓였고, 선전 매체를 통해 울려 퍼졌고, 유엔에서 부딪혔다. 증오와 불신과 적개심은 남북뿐 아니라 남쪽의 여러 이념 집단과 정치 세력들의 언어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대에는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절망감을 떨쳐 내기가 어렵다. 말이 소통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이 시대는 좁은 출구를 겨우 찾아갈 수 있을 터인데, 말이 적대하는 전투에 동원된 시대에 나의 말은 무력하게 들리지만, 무의미하지는 않기를 나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