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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Jul 21. 2024

<언제나 책봄> 김훈의 '허송세월'

깨달음의 통찰이 곳곳에 드리우다

허송세월이 갖는 단어에 의미를 알고 있기에 주말 중 하루는 유유자적 소파에 널브러져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치열한 젊은 시절을 뒤로한 노작가의 글은 어떨까 상상하며... 파자마 차림에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을 서성이다 소파에 누워 첫 장을 넘겼다. 세로로 된 하얀 원고지 밑에 작가의 글씨체로 보이는 이름 '김훈'이 적혀 있다. 따뜻해 보이는 글씨체와 달리 [1948년 서울 출생, 장편 소설 <하얼빈>,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산문집 <연필로 쓰기> 등이 있다.] 단 4줄의 약력과 한 장의 프로필 사진은 아우라가 넘쳐난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역동적인 흰 머리칼에 부리부리한 눈, 깊게 파인 주름, 비교적 큰 코를 가진 작가의 얼굴은 범상치 않았다. 살아온 세월이 묻어나는 그 얼굴에 매료돼 한동안 사진을 바라봤다.

서문 '늙기의 즐거움' 한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 푹신한 소파에 건방지게 누워있던 내 몸뚱이는 나도 모르게 저절로 바르게 앉는 자세가 되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가 여주인공인 은탁 뒤에서 우산을 들고 서있던 명장면을 보고 숨이 턱 멎을 것 같던 그 순간, 내 몸이 절로 티브이 앞으로 기우는 것처럼.... 김훈의 '허송세월' 첫 문장을 읽고 책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핸드폰에 부고(訃告)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 있다. 무한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 사이에 시차가 없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 되어 있고 사물화 된 만큼 허구로 느껴지지만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계좌도 찍혀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관성적 질감은 희미한데, 죽은 뒤의 시간의 낯섦은 경험되지 않았어도 뚜렷하다. 이 낯선 시간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평안이나 불안 같은 심정적 세계를 일체 떠난 적막이라면 더욱 좋을 터이다.


애착 가던 것들과 삶을 구성하고 있던 치열하고 졸렬한 조건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풍경은 쓸쓸해도 견딜 만하다. 이것은 속수무책이다.


'늙기의 즐거움'이란 제목을 달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흐르는 시간 속에 만 76세가 된 노년 작가의 진심 어린 소회가 묻어나 나 또한 쓸쓸해졌다.


그러다 50년 넘게 술을 마셔 왔다는 작가가 술에 대해 쓴 글을 읽을 땐 꼭 내가 술에 얼큰하게 취한 것처럼 그의 글에 취해버렸다. 작가는 와인, 막걸리, 소주, 위스키, 사케 등 각각이 갖고 있는 술의 특징과 분위기, 풍미 등을 맛깔나고 멋스럽게 무엇보다 품격 있게 표현했다.


와인은 현실을 서서히 지우면서 다가온다. 와인의 취기는 비논리적이고 두리뭉실하다. 이 취기는 마음속에 몽롱한 미로를 끝없이 펼쳐 놓는데, 그 미로를 따라가면서 마시다 보면 출구를 찾지 못한다. 와인의 맛은 로맨틱하고, 그 취기의 근본은 목가적이다.


이 부분을 읽고 건넌방에 누워계신 엄마에게 쪼르르 다가가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이 책 끝내줘. 어쩜 술맛을 이렇게 표현하지? 글에 맛이 있어. 글 맛이!" 이렇게 말하고 또다시 소파로 돌아가 책을 읽는데 불현듯 글 잘 쓰는 작가가 샘이 나고 부러워서 시큰둥해졌다. 난 글의 맛을 알기나 하나? 내 감정을 토해내기 급급했던 지난날의 글 쓰기... 언어를 도구로 활용해 조사, 부사, 명사 등을 잘 버무리고 요리하고 덜어내는 작가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내가 즐겨 마신 술은 위스키다. 위스키의 취기는 논리적이고 명석하다. 위스키를 몇 방울 목구멍으로 넘기면 술은 면도칼로 목구멍을 찢듯이 곧장 내려간다. 그 느낌은 전류와 같다. 위스키를 넘기면,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그 전류의 잔잔한 여파들이 몸속으로 퍼진다. 몸은 이 전류에 저항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인다.


솔직히 말하면, 난 이 부분을 읽고 냉장고 안에 있는 짐빔 하이볼을 한 캔 땄다. 가끔은 취중에 을 읽기도 하는데 찌는듯한 무더위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다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김훈의 책을 꼭 안고 소파에 누워있었다. 책을 안고 자긴 처음이었다.




부스스 낮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고 남은 부분을 읽어 나간다. 눈으로 빠르고 읽을 수도 있었지만 뉴스 원고를 방송 전 예독 하듯이 천천히 소리를 내며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 싶었다. 작가가 지난봄 몸이 아파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쓴 글 '다녀온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특히 진보와 보수, 진영 논리로 나뉘어 물고 뜯고 싸우고 있는 중이라면 꼭!

일상의 흔한 풍경을 묘사하는 부분에선 마음이 편안해져 둥둥 떠다니다가도 '세월호'에 대한 부분은 마음이 아려와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다. 작가는 책 제목을 '허송세월'이라고 했지만 책 내용은 그 반대다. 3부로 구성된 책 속에는 '혼밥, 혼술', '안중근의 침묵',  '청춘 예찬' 등 우리 시대의 적나라한 단상과 깊이 있는 통찰력,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는 언어적 유희가 있다.


특히 '적대하는 언어들'은 남과 북이 갈라졌듯이 이념과 사상으로 둘로 나뉜 우리나라의 아픈 현실을 꼬집는 것 같아 여운이 오래 남았다.


지난 70년 동안 이 불행한 분단의 시대를 지배한 것은 증오와 불신과 저주의 언어였다. 이 언어의 쓰레기들은 판문점에서 쌓였고, 선전 매체를 통해 울려 퍼졌고, 유엔에서 부딪혔다. 증오와 불신과 적개심은 남북뿐 아니라 남쪽의 여러 이념 집단과 정치 세력들의 언어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대에는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절망감을 떨쳐 내기가 어렵다. 말이 소통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이 시대는 좁은 출구를 겨우 찾아갈 수 있을 터인데, 말이 적대하는 전투에 동원된 시대에 나의 말은 무력하게 들리지만, 무의미하지는 않기를 나는 바란다.


지금도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들로 내 귀는 얼마나 피곤했던가.

요즘 부쩍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벽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자신이 믿는 확고한 신념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특히 더 그렇다.

부디 작가의 말처럼 말이 소통의 능력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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