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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Jul 07. 2024

<언제나 책봄> '한석준의 말하기 수업'

책 속에서 과거의 나를 만나다

찐 핑크색 행텐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그 당시 제일 유행했던 브랜드)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난 스튜디오 리포터 자리에 서서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이 떨렸지만 "가영 학생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 하며 내쪽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는 이금희 아나운서의 온화한 얼굴을 마주하자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히려 자기소개를 마치고 미리 준비해 온 VCR화면이 나올 때는 더 잘하고 싶은 여유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충북 괴산에 살던 12살의 난  '전국 최초 어린이 반상회'라는 아이템으로 서울 KBS 본사에 가서 6시 내고향 생방송을 하던 날 이금희 아나운서를 처음 보았다. 방송이 끝나고 담당 PD와 이 아나운서는 "나중에 커서 아나운서나 방송 일 하면 정말 잘할 것 같아요. 오늘 너무 잘했어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로 내 꿈은 피아니스트에서 아나운서로 바뀌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 아나운서 시험만 보면 보는 족족 떨어지는 것이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아나운서를 포기하고 얼결에 기자가 됐지만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절호의 기회가 온다. 첫 째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 중에 있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복직하면 앵커 할 준비 해"

'어마나 웬일이니~ 웬일이니~'  애기띠를 하고 아이를 안고 있었던 난 국장 전화를 끊자마자 거실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선 나. 산너머 산이다. 출산으로 20Kg이나 불었던 이 몸뚱이의 살들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가 당시 최대 난제였다. 바로 친정 엄마에게 얘기하고 '핫 요가'를 끊었다. 당시 핫 요가가 유행이었는데 찜질방 같은 곳에서 요가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전장에 나간 병사다'란 각오로 가수 이효리를 상상하며 이를 악물고 살을 뺐다. 17kg을....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독했고, 뒤늦게 찾아온 꿈을 이루기 위한 나의 열정은 대단했다. 뉴스룸에 앉아 미리 기사를 예독 하는 것이 좋았고, ON AIR 사인이 들어오고 방송하는 그 순간은 짜릿할 만큼 행복했다.

이런 시간들도 있었는데....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방송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내가 그 일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그런데 엄마 책상 위에 놓인 '한석준의 말하기 수업'을 보고 옛 추억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훤칠하게 큰 키에 발음도 목소리도 방송 매너도 좋은 한석준 아나운서가 책 표지 주인공이었는데, 이걸 어쩌나? 책 읽기 시작 전부터 흐뭇한 미소가 절로 흐른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며 지나온 시간들이 소환됐다. 12살의 가영, 대학시절의 나, 기자였던 34살의 나, 그리고 어쩌다 공무원이 된 45살의 나까지.

발성의 기초 훈련, 복식호흡 부분을 읽을 땐 대학 시절 연극영화학과 신체훈련 수업이 떠올랐다. 아나운서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 없지만 대학 때 배운 복식 호흡과 발성. 발음 연습, 연극 대사 칠 때 호흡 요령 등은 책 속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연영과에서 빡쎄게 배운 훈련이 방송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책 읽기의 가장 큰 장점은 책을 통해 나 자신과 만나는 일이다. 책 속의 등장인물과 내 삶을 견주어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단단해진 자아를 발견하고, 책을 읽는 동안 지나온 삶 속의 기쁨과 슬픔, 사소한 기억 등을 떠올리는 일이다.

<경청을 잘하는 사람이 말도 잘한다> 편에 소개된 이금희 아나운서에 대한 부분은 날 추억 속으로 데려갔고,

얼마 전 충북교육도서관이 주최한 북 콘서트에 이금희 아나운서가 왔을 때, 그녀를 재회한 벅찬 감동과 기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기억 못 하실 수도 있는데 국민학교 5학년 때 어린이 리포터로 이금희 선생님과 방송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꼭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었고, 그 꿈을 기자가 되어서 이뤘어요. 그리고 지금은 교육청에서 일하고 있고요."

이 말을 30여년이 지나 이금희 선생님 앞에서 말할 때 내 심장은 12살 그때처럼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아나운서 선배 중에 경청하는 태도로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금희 아나운서입니다. 저는 '진행자는 말을 잘하는 사람인 동시에 잘 들어주는 사람이구나'를 이금희 선배를 보며 배웠습니다. 저는 이금희 선배의 방송을 모니터링하면서 대표 멘트를 찾아냈습니다. 마법 같은 한마디였죠. 출연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그들이 속마음을 꺼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 한마디는 딱 한글자입니다. 바로 이거죠.
"네~."               
-한석준의 말하기 수업 中에서-

<2부 이럴 땐 이렇게 말해보세요> 중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내 편을 잃지 않는 말' 부분을 읽을 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이란 명분으로 상대방 가슴에 꽂히는 말을 하지 않았나? 꼭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을 했어야 했나? 아직도 기자인 줄 아나? 등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알려줘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방의 이야기에서 틀린 부분에 대해 그저 질문만 던져보세요. 예를 달면 "방금 말씀하신 내용에서 이 부분은 무슨 뜻인가요? 혹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한데요?" 이런 식으로 말이죠. 이렇게 틀린 부분을 두세 번 정도 질문하면 상대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본인의 논리에 허점이 있다는 것과 그런데도 상대방이 자신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넌지시 알려줬다는 것을 말입니다.

P150. 이럴 땐 이렇게 말해보세요 中에서

그 사람의 말을 보면 그 사람이 타고 태어난 기질과 성정, 인품, 삶의 태도 등을 엿볼 수 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억지로 나의 말하기 습관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매 순간 진심을 다해 말하는 내가 되기를...

진심이 통하지 않는 인간들을 대할 땐 가끔 마음을 숨기는 기술을 발휘해 지혜롭게 대처하는 내가 되기를...


지난 주말 가족들과 함께 안동을 다녀와 마감이 많이 늦었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본 '하회 선유 줄불놀이'를 언젠가 꼭 보러 가고 싶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나서 갑자기 다녀온 여행.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 속 길고 긴 기다림 끝에 별을 보았다. 밤하늘 부용대에서 낙동강으로 쏟아진 잔잔하고 아름다움 별똥별.

은은한 멋을 알았던 선조들의 삶을 떠올려본다.

우리 가족에게도 "낙화야!"를 외칠 때 떨어졌던 불덩어리가 추억으로 오래오래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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