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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지호 Jul 26. 2023

나는 감정 쓰레기통인가 봐요.

R : “지호야 오늘 밤에 뭐해?”


R에게 연락이 온다. R은 요새 인간관계에 관하여 고민거리와 스트레스가 많다.
그리고 나는 R의 똑같은 고민 이야기를 벌써
!!다섯 번!!은 넘게 들었다.
가끔은 나는 R과의 만남을 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 : “나? 다음 주에 시험이 있어서, 오늘은 집에서 공부하려고..”

R : “진짜? 나도 토익 공부하려는데 같이 카페 가서 공부할래?”


더 이상 공부를 미룰 수 없다. 오늘마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시험 결과는 보나 마나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R과 만나면 연 내가 공부를 할 수 있을까?


나 : “오늘은 밖 나가기도 귀찮고 집에서 하려고.. 오늘따라 집이 집중이 잘되네”

R : “아니 다름이 아니고, 고민 들어줘서 고마워서 오늘 내가 커피랑 케이크 쏘려고, 내가 데리러 갈게”


나는 R에게 오늘은 만나기 싫다는 나만의 소심한 거절표현을 해본다.

하지만 R은 나의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 카페에 가면 고민이야기를 한번 더 들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고맙다고 표현하는 R의 성의를 도저히 거절할 명분이 없다.


나 : “알겠어. 언제까지 준비할까?”

R : “나 운동 끝나고 한 시간 후에나 데리러 갈게!”


그렇게 R의 강한 의지에 나의 소심한 거절표현은 묻히고 만다.

나는 듣고 있던 인강을 두 배속으로 올려 빠르게 듣는다.

지금부터 집중해도 합격이 불확실한데 나는 확실한 불확실을 향해 스스로 이동한다.


R : “지호야, 지금 도착했으니까 내려와”


R의 연락과 함께 내려갈 준비를 한다.

공부할 책 세 권을 가방에 넣으려다 가장 가벼운 한 권을 제외하고

남은 책들은 가지런히 꺼내어 책상에 올려둔다.

어차피 공부 못할 거 두고 가자..

하지만 마지막 한 권은 끝내 포기하지 못한다.


R : “지호야 오늘 카페는 외곽 쪽으로 갈래? 이쁜곳 많더라


왁스로 힘준 머리에, 말끔한 옷과 코트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향수..

복장을 보아하니 오늘 가까운 곳 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전혀 괜찮지 않지만 거절을 잘 못하기에 돌려서 표현해 본다.


나 : “오늘 운동도 하고 피곤하지 않아? 요새 계속 잠도 못 잤잖아”

R : “나 운전하는 거 좋아하잖아. 괜찮아 괜찮아~ 나 향수 바꿨는데 어때?

      나 머리 가르마펌할까? 나 코트 한 벌 사려고 “


R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하고, 나는 체념한다.

R은 나의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강하게 표현하지 못한 결국 나의 문제겠지..


나는 R이 좋아할 만한 반응들을 골라 생각하며 타이밍에 맞춰 리액션해준다.

어쩌면 나는 정말 가식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나는 패션도 잘 모르고, 향수 구별도 잘 못한다.

그리고 R의 물음에는 답이 정해져 있다. 어차피 정해진 답이라면

나는 R이 좋아할 만한 반응을 고민하여 적절한 리액션을 해준다.

그렇게 일방적인 이야기 꽃시 피운사이 우리는 카페에 도착했다. 

정말 공부하기 아쉬운 매력적인 분위기의 카페다.

핸드폰을 들어 빠르게 인스타 스토리에 올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R에게 나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이어폰을 조용히 끼어본다.

R과 적절한 눈치싸움을 한지 10분째, 조용히 R이 입을 연다.


R : “지호야,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역시나 R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 백번을 이긴다는 말이다.

나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뻔히 알았지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에 의하여 원치 않은 상황에 부딪히고 만다.


R과 함께 등장하는 3명의 그룹의 여자. 여자(A)는 R을 좋아하고 

R은 다른 여자(B)를 좋아하는 것 같고, 

하지만 다른 여자(B)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으며, 

여자(A)를 친구에게 밀어주려는 상황. 

세상 제일 어려운 게 연애 이야기인데 

등장인물도 한 두 명이 아니다.

여러 번 들은 이야기라 3명의 여자는 

이미 나에게 내적 친밀감마저 쌓여있다. 

그리고 같이 등장하지만 아무 영향력 없는 C에게

나는 이상하게도 감정이입이 된다.

나는 이상하게도 감정이입이 된다.

나는 가장 심플한 대답을 내놓는다.


나 : “넌 A 좋아해?”

R : “난 잘 모르겠어. 한 명이 특별히 좋은 게 아니고 다 같이 만나는 게 좋아”

나 : “너 행동은 B를 좋아하는 것 같아. 다른 인원들이 A를 너한테 밀어주고 있는 거 느끼고 있잖아”

R : “아니 나는 그저 이 인연을 이어주게 해 준 B가 고마울 뿐이야. 다른 감정은 없어”

나 : “그럼 너는 뭐가 문제인 거야?”

R : “아니, 나는 그냥 이 그룹 자체가 좋은데, 이 관계가 깨질까 봐 걱정된다 이거지”

나 : “그럼 관계를 유지해. 그런데 목적이 있어 맺어진 인연이 계속 이어질지는 난 잘 모르겠다. 네가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R : “그건 맞는데.. 아니 그나저나 왜 참모님은 나만 보면 화내시냐. 진짜 나 보고 들어가기도 싫다.”


R의 두 번째 이야깃거리인 참모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길 시작한다.

적절한 타이밍에 다시 공부 시작하려 했는데, R의 얼굴을 보아하니 이미

분노로 가득 차버렸다. 그런 그의 얼굴을 난 외면할 수 없다.

자신이 느낀 감정들 억울한 점들을 계속 쉬지도 않고 뱉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묵묵히 이야기 들어주며, 적절한 위로와 반응을 해준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개운해지는 R과, 그럴수록 급격하게 힘들어지는 나

우리의 감정은 서로 바뀌기 시작한다.


R : “지호야, 나는 진짜 너랑 있으면 왜 이렇게 편하냐? 우리 나중에 술 한잔 해야지!”

나 : “응, 나 지금 다이어트 기간이어서, 다이어트 끝나고 시간 되면 꼭 더 진득하니 이야기하자!”


아무래도 나는 감정쓰레기통이 분명하다.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나에게 남은 감정들은
그들이 나에게 버린 감정들로 가득 차있다.




우리가 이런 관계가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넉살 좋고 자존감 강한 R,

R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다.

내가 만약 R의 이야기를 적시적기에 끊었더라면

R은 나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꼈을까?

나는 R에게 이 정도로 부담을 느꼈을까?

이 모든 것은 R에게 나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을 하지 못한

나의 탓이다.


우리의 관계를 위해서 때로는 NO라는 표현이 필요하다.

오늘도 NO 할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조용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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