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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레터 Jun 19. 2024

연재 소설 8화 - 빙의의 시간, 스마트폰의 흔적들

미스테리 연재 소설 - 선정이 스마트폰의 흔적 


화양구의 30년 된 아파트 상가건물 2층 코너에서 시작한 <공감 정신건강의학과>는 손동호 원장의 방송 출연과 함께 유명세를 타더니 잘 나가는 개인병원들이 모여있는 M 타워로 3년 전 이전했다. 일부러 마지막 진료 시간인 밤 8시로 인터넷 예약을 하고 방문했다. 원목 테이블 여러 개를 널찍하게 배치하고, 전자동 커피 머신을 갖춘 진료 대기실은 안락한 카페 같았다. 대기실 한쪽 벽면의 대형모니터에선 손동호 원장의 방송 출연 동영상과 출간 예정인 신간 광고가 번갈아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간호사가 건네준 진료 접수증을 작성하고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아늑함을 강조하기 위해 낮춰둔 조도와 파란색 벽면 때문에 진료실 공간은 마치 커다란 수족관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동호 원장은 몇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윤기가 흐르는 반질 발질한 얼굴, 의사 가운 안에 받쳐 입은 검은색 반목 티셔츠, 동그란 무테안경렌즈에 달린 엔틱한 느낌의 청동 브리지. 딱 봐도 스티브 잡스를 따라 한 코디지만, 묘하게 날카로운 느낌의 그의 얼굴과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모니터로 진료 기록을 살피며 그가 말했다.     


”어디...은호 학생. 마지막 방문이 19년 11월이네.. 오랜만이야. “


차분하면서도 친절하게 느껴지는 중저음 보이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와의 상담은 어딘가 불편했었다.     


“ 예전이랑 그대 로시네요. 안경도 옷차림도”

“ 그 말 칭찬이지? 마음에 드는 물건은 똑같은 걸 여러 개 사두거든. 요샌 유행이 워낙 빠르게 지나니까 나중에 사려 하면 품절돼 버리더라구, 그래서 많이 사 두고 돌려 입으니 단벌 신사처럼 보이나 봐.”

“ 그런 것도 일종의 집착인가요?”     


나도 모를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거 뭐지?’ 하는 표정이 스쳤지만, 이내 부드러운 말투로 그가 말했다.     


“ 하하, 갑자기 훅 들어오는 게 MZ 세대 화법인가?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가 아니면 집착이라 하지 않지. 오늘은 무슨 일로 왔을까? 불면증은 이제 괜찮나?”

”그냥 날밤 새는 게 일상인 일에 빠져 살다 보니 불면증을 잊은 거 같아요. 오늘 방문은... 공부 시간도 빠듯한 고 3 멘탈을 자꾸만 흔드는 빌런이 있어서요. “     


안경 너머, 가로로 길어진 두 눈은 집중모드로 전환한 듯 찬찬히 나를 주시했다. 모든 것에 공감하는 것처럼 입가엔 미소를 머금고 짓지만, 내담자의 표정, 눈빛, 말투와 숨소리 하나까지도 빠르게 스캔하는 안경 너머의 시선. 처음으로 그의 두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면서 깨달았다. 그 불균형의 간극이 늘 불편했음을.


”고민이 있어 친구한테 조언을 좀 구했는데, 알고 보니 그 녀석이 소문을 몰고 다니는 소문 남이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 싹 퍼졌죠, 내 얘기가. 원본과는 전혀 다른 헐리우드급 각색본으로 말이죠. 덕분에 내가 아주 막돼먹은 놈이 돼버렸어요. 이런 녀석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소문남? ㅎㅎ조심하지, 안타깝게도 살다 보면 그런 캐릭터들이 주변에 있기 마련이지. “

“짜증 나서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쳐야 시원할 거 같은데,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글쎄.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안되지. 인생은 열폭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야. 나 같으면 꼼짝없이 잘못을 인정하게 만드는 무기 같은 것을 준비할 거 같아. 그러고 나서 기습작전을 쓰는 거지.”

“역시...전문가시네요. 이런 건, 어떤가요?”     


밤새워 커뮤니티를 살피면서 긁어모은 S양 관련 게시글과 댓글, 손동호 원장의 블로그 게시글, 메틸페니데이트 성분에 관한 글을 담아둔 USB를 그에게 건넸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USB를 노트북에 꽂고 한동안 모니터를 살피던 손동호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풋~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히죽 인다.      


“은호, 이게 다 뭐지?”

“제정신이 아닌 정신과 의사가 SNS에 올린 S양 저격 글. 네티즌 댓글을 유도하는 화력이 엄청나던데 과녁 끝에 사람 세워두고 총질하는 게 취미예요?”

“헛소리에 답을 해야 할 가치를 못 느끼지만, 총질이라니 워딩이 도발적이군.”

“당신이 블로그에 쓴 S양이 선정이라는 거, 화양구에 오래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던데. 선정이한테 동의받고 쓴 거 아니잖아!”

“그 애라고 적시한 적이 없는데.”

“아직 펴보지도 못한 아이가, 당신한테 상담받던 학생이 죽었어. 당신이 허위 유포한 글 때문에 얼마나 영혼이 탈탈 털렸는지, 표창처럼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악플이 마음에 박히면 얼마나 철철 피를 흘리게 되는지 정신과 의사가 정말 모르겠어?”

“은호. 선정이 죽인 살인자를 찾아온 탐정같이 구는군. 그것도 사건에 대해 전혀 이해 못 한 풋내기 탐정 말야. 내가 인정할 건 하지, 그 게시글은 선정이 이야기는 맞지만, 절대 허위사실이 아냐. 오히려 난 그 애를 보호하려 한 거야. 그 애 아빠라는 작자로부터 말야.”     


손동호 원장은 책상 서랍을 열더니 원통형 모양의 투명 플라스틱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 안에는 빨간약 캡슐이 2/3 정도 차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상자를 옆으로 눕혀 내 쪽으로 굴려 보냈다.     


“문제가 된 약이야. 선정이 아빠가 고1 때부터 이 약을 먹으라고 줬다는데, 내가 참을 수 있으면 먹지 말고 가져오라 했어. 약을 안 먹으면 불안해하길래 최소한 줄여라도 보자고. ‘공부 잘하는 약’이라고 몇 년 전부터 학군지에서 너도나도 ‘ADHD 치료제’를 구해 먹이는데 이게 그렇게 남용해도 되는 약이 절대 아냐. 주성분인 메틸페니데이트는 도파민 수송체를 차단해서 일시적으로 도파민 농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해. 우리 뇌를 강제로 활성화하니까 일시적으로 학습에 집중력이 생길 수 있지만, 강제 흥분상태에 적응하면 점점 더 복용량을 늘리게 돼. 식욕부진, 소화불량 같은 부작용은 흔하고 심하면 우울증이나 환각증세를 유발하기도 해. 미국에서는 중독 끝에 자살사례도 보고된 적이 있지. 그 애는 1학년 때 한 알을 먹었다는데 나와 상담을 시작한 2학년 여름에는 이걸 네 다섯 알씩 먹는다고 했어. 미친 짓이지. 메틸페니데이트 성분 약들은 의료용 마약류라 과다처방하게 되면 마약류 관리법에 의해 처벌받는 약이야. 그런데 선정이 아버지는 의사라는 직위를 이용해 애를 망치고 있었어. 그놈의 성적, 내신 등급  때문에, 처방전도 없이!”

“그럼 그 아버지를 처벌받게 하던가, 당신은 멀쩡한 아이를 약쟁이로 만들었어.”

“그래도 핏줄인지 자기 아버지에게 해가 되는 건 원치 않았어. 상담 사실 자체를 아빠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하더군. 그리고 이건 죽은 아이를 생각해서 묻어두려 했지만, 탐정 놀이를 끝내기 위해 알려주지. 보다시피 그 앤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어. ”     


그는 노트북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리더니 폴더에 저장된 앨범을 열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기괴한 사진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피눈물을 흘리는 인형 사진, 벽면에 머리를 붙인 여자들이 공중에 붕 떠 있는 흑백 사진, 밤하늘을 뒤덮을 만큼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악마의 사진, 그다음 사진은…. 기괴함을 넘어 공포스러웠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나무관 십여 개가 주르륵 매달려 있는 사진이었다.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고 들어봤나? 흔히 말하는 다중인격? 빙의라는 말로도 자주 쓰이지. 특정 인격이 정신을 지배했을 때의 행동을 전혀 기억 못 하는 게 특징이야. 보통 여성들에게 더 많이 나타나. 이 사진들은 선정이 스마트폰에 있던 사진을 치료 때문에 모아둔 거야. 하드코어 공포물 같지 않아? 온통 엽기적인 사진들. 선정이 본인은 다운로드 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 이런 사진들이 자꾸만 스마트폰 앨범에 늘어난다는 거야. 자기 영혼이 봉인해제되어 유령처럼 이곳저곳을 떠도는 느낌이라 하더군. 이 현관장 사진을 나에게 보여줄 때의 표정은 공포 그 자체였어.”      


비바람에 다 삭아버린 것 같은 나무 관이 절벽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기이하고, 오싹했다. 다중인격이라니, 도대체 선정이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현관장 - 중국 고대 일부 소수 민족들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처리하던 방식. 관을 절벽 중턱에 있는 동굴 속 또는 돌에 두거나 절벽에 박은 말뚝 위에 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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