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의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위눌림 사이로 무수히 날아든 던, 그리고 일상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튀어 올라 사고의 지면을 뿌연 먼지로 흩어버리던 그것. 오늘 아침에도 나는 분명 보았다. 가출팸 여학생 자살 사건 보도에서 어두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검은 날개를. 도상학의 부호처럼 난해하게 주위를 맴돌던 검은 날개가 이제 내 삶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정렬되며 두 개의 세계가 가까워지고 있다. 어느 쪽이 먼저 부서질지 알 수는 없지만, 캄캄했던 어둠 속에 조명 하나가 딸깍 켜진 것처럼 서서히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누구나 손이 갈 만큼 탐스럽고 유혹적이지만, 음험하고 위험한 놈의 검푸른 깃털, 어둠을 풀어놓는 거대한 날갯짓.
”이 사진들 누가 보낸건지 알아?“
”동생 다슬이 폰으로 전송된 거 모아둔 거야. 확실하진 않지만, 영진이 패거리 아니겠어? 나한테 한 달 안에 대출 해결 못 하면 지옥을 보여주겠다 했어. 사실 너한테 이런 얘기 하는 거 존나 무섭다. 학교 총판 조직 노출하거나 신고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린다구...“
동호는 공포 가득한 눈으로 노래방 밖을 연신 살피며 심하게 떨고 있었다. 무인 코인 노래방으로 나를 불러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동호의 스마트폰에서 와이파이와 모바일 네트워크를 모두 해제하고 유심칩을 일단 빼냈다. 협박이 일상인 놈들이라면 스마트폰 해킹으로 동호를 추적하고 있을것이 뻔했다.
”걱정 마, 해킹은 응급처치했어. 차근차근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봐.“
동호는 텔레그램 앱을 열어 그동안 총판 조직에게 받았던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협박 메시지를 보낸 것은 두 놈. 그 중 닉네임 ‘마이더스 뱅크’는 동호의 원금과 이자, 상환일을 메시지로 꼬박꼬박 전송하고 있었다. 그러다 상환이 예정일보다 늦어지면 동호의 신상정보를 SNS에 유포하는 ‘온라인 공개처형’을 실시하겠다고 협박했다.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터진 것처럼 주눅 들어 보이는 주민등록증 속 동호의 사진, 그 옆에 연락처를 올려두고 이런 메시지를 첨부했다.
<7천만 원 대출하고 먹튀한 서일고 3학년, 이동호. 010-***-****. 사기꾼, 도박쟁이 신상 공개합니다! 저처럼 선량한 피해자가 더 생기지 않길 바랍니다!! >
”그러니까 이 게시글을 언제든지 SNS에 올리겠다고 협박한다는 거지? 에휴...7천만원...어쩌다 이렇게 큰 빚을 진 거야?“
”이거 온라인에 뿌리면 그날로 난 끝이야. 현금 줄 완전 꽉 막히고 학교에서도 다 알게 될 텐데. ㅈ같은 새끼들, 사실 원금은 얼마 되지도 않아. 이자가 하루 10퍼, 열흘이면 100퍼 이렇게 미친 듯이 올라가. 내가 이렇게 망가진 게 모두 영진이 총판 미끼 때문인데.....“
”마이더스 뱅크 말고 M, 이 녀석은 또 누구야?“
”마이더스 뱅크도 M도 정확히 어떤 놈인지 몰라. 얼마 전부터 다슬이 사진이랑 학교 신상정보를 싹 털어서 나한테 보내고 있어. 내 동생 중3인데..공부도 아주 잘해. 지금 과고 준비 중인데... 다 찾아내서 죽이고 나도 죽고 싶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 희번덕한 살기가 동호의 눈빛에 스치는 것을 순간 보았다. M이 보낸 사진 속 다슬이는 이동식 모니터에 앞에서 무언가 발표 중인 모습이다. 똘망똘망한 큰 눈, 정수리까지 하나로 단단하게 올려 묶은 머리. 딱 봐도 집중력 있는 학생이란 느낌이 든다. 다슬이에게는 기괴한 사진을 전송하고, 동호에게는 여동생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 협박 중인 놈들. 빌려준 돈을 회수하기 위해 이토록 교활한 것일까? 인간의 창의성이 가장 고도화되는 순간은 사악함을 입을 때이다.
동생만큼은 아니지만, 1학년까지 중상위권을 유지하며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동호는 자신이 왜 도박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 해주었다. 2학년이었던 작년 봄, 동호와 같은 반이었던 진욱이가 갑자기 백만 원이 훌쩍 넘은 명품 지갑과 구찌 운동화, 최신 아이폰 같은 아이템들을 학교에 가져와 자랑하기 시작했다. 동호처럼 한부모 가족인 진욱이가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것인지, 온통 명품으로 치장한 것을 내심 부러워하던 동호에게 진욱이는 도박으로 꽁돈을 완전 줍줍 하고 있다면서 매달 천만 원 이상 입금되고 있는 스마트폰 계좌를 확인시켜 주었다.
진욱이가 텔레그램을 통해 알려준 도박사이트에 가입하니, 사이버 꽁머니 1만 원이 무상 지급되고 문자로 치킨 기프티콘이 동호폰으로 전송되었다. 도박사이트들이 처음 도박에 손대는 이들에게 강렬한 쾌감을 주기 위해 ‘초심자의 행운’을 부여한다는 것을 동호는 몰랐을 것이다. 첫날 바카라 도박으로 20만 원을 딴 동호는 이게 바로 ‘멋진 신세계’라고 생각했다. 식당일 때문에 밤마다 어깨통증을 호소하는 엄마를 이제 호강시켜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진욱이는 영진이가 교내에 심어둔 슈퍼전파자, 도박 총판의 모집원이었다. 한 명의 친구들을 신규회원으로 등록시킬 때마다 진욱이의 통장에 꼬박꼬박 돈이 꽂힌다는 것을 순진했던 동호는 알지 못했다.
첫 도박에서 딴 돈이 바로 통장에 입금되자 ‘갓 생’을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동호는 흥분했다. 그러나 도박 스토리의 뻔하고 흔한 클리셰에서 동호 역시 예외일 순 없었다. 크게 딴 돈을 잃자, 빠듯한 용돈을 모아 200만 원 넘게 저금해둔 통장이 텅장이 되는 데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고, 그후로는 SNS에 널린 소액대출 ‘대리 입금’을 받아 도박을 이어갔다.
”점점 갚아야 할 빚이 커지니까 C 발, 돌겠더라구. 중고나라에 가짜 물건 올려 돈만 챙기고, 가개통한 휴대폰 팔아서 급전 땜방하는 ‘휴대폰깡’까지 안 해본 게 없다..그러다 진짜 내 인생 개막장까지 간 게 엄마 잠든 사이에 엄마 신분증 찍어 보내고 휴대폰 인증받아서 대부업자한테 ‘부모론 대출’로 2천만 원을 받았어. 그동안 받은 소액대출 다 정리하고 원금 찾으면 도박 끊는다 생각했는데..진짜 나는 개쓰레기야. 쉬는 날 하루 없이 설거지통에 코 박고 사는 엄마한테 내가... 그냥 나 같은 놈은 죽어 없어지는 게 나을 거야.....“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왼쪽 손목을 보여주는 동호. 여자처럼 가냘픈 손목 위로 세상을 끊어내려 했던 흔적, 분홍색 희미한 칼자국 두 줄이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녀석의 어깨를 꽉 잡았다.
”미친놈, 죽으면 엄마 가슴에 대못 치는 거 몰라? 식당일 하시면서 유일한 소망이 자식들 잘 키우는 것이었을 텐데 도박중독으로 아들이 자살하면? 너희 엄만 그때부터 진짜 생지옥에 사는 거야!“
무책임하게 세상을 버리려고 했다니, 불쌍하고 화가 났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우물. 그것을 마음에 품고 사는 남겨진 자의 삶을 동호가 알까? 깊은 우울감에 허우적대는 어느 날 내가 먼저 그 속으로 뛰어들지 모른다는 불안감,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릴 것 같은 마음속 검은 구멍.
”가자, 집으로. 일단 뭐라도 먹자. 답 없어도 매일 딱 하루만 버틴다는 생각으로 살아. 그렇게 하루하루가 모이면 그게 삶이 돼.“
전복과 꽃게를 듬뿍 넣은 해물 라면을 동호는 정신없이 먹는다. 불안에 쫓기듯, 순간순간 부르르 몸을 떠는 동호를 옥상 캠핑존으로 데려오면서 지훈이에게 메시지를 넣었더니, 직업학교에서 실습하고 남은 재료들을 가져와 푸짐한 해물라면을 끓인 것이다.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눈 위에 습윤밴드를 붙인 동호의 얼굴이 그래도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동호가 엄마 몰래 대출받은 ‘부모론’ 이천만 원까지 도박으로 다 날리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구원처럼 다가와 대출을 내준 것이 영진이였다. 매일 10%씩 더해지는 살인적인 이자율, 돈을 빌린지 10일째면 원금만큼의 이자가 생기는데도 큰돈을 갚을 수 있는 탈출구가 도박밖에 없다는 생각에 교내 총판 대출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물까지 싹 비운 동호의 그릇에 다시 라면을 푸짐하게 퍼주면서 지훈이가 말했다.
”이동호,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니 일단 잘 먹고 정신 차려. 보육원 동기랑 선배 중에도 도박으로 인생 시원하게 말아먹은 사람 꽤 많이 봤거든. 보호 종료되면 매달 20일에 기초생활수급비가 들어오는데 도박으로 순삭하더라구. 인터넷 도박사이트 운영자 새끼들 진짜 피도 눈물도 없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진공청소기처럼 돈만 빨아들이면 땡이니까. 야, 근데 도박 사채 안갚아두 돼. 법정 이자보다 수십 배라 그거 다 불법 대출이야. 커밍아웃하고 나랑 배달이나 같이하자. 정신 좀 차리게.“
”그러려면 지금까지 도박한 거 까발리고 감방 가거나 벌금 물어야 할텐데..난 못해. 더구나 동생 개인 정보 싹 털어 협박하는 놈들이 먹튀 하면 그냥 두겠어? 우리 다슬이를..“
”놈들이 학교에서 철수하고 나가떨어지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뭐가 있을까? 놈들을 꼼짝 못 하게 엮어 한 방에 보내버리는 방법. 그때 동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내 체육관 무대 옆 방. 거기 뒤져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 놈들 아지트야“
구관 지하 실내체육관 앞에서 나를 만났을 때 떨떠름하던 영진이의 표정. 그리고 실내체육관의 침침한 어둠을 뚫고 광선처럼 흘러나오던 푸른 빛. 그곳에 정말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