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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Apr 29. 2024

행복하세요

며칠 전 지하철을 타려는데 개찰구를 통과하는 사람들이 찍는 카드 단말기에서 여기저기 "행복하세요"라는 소리가 들린다.

이젠 개찰구를 지나며 '~'하는 단순한 기계음이 아닌 감정적 메시지를 주고자 한 것인가 싶어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교통카드를 찍을 때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니 65세 이상에게 주어지는 무료승차 대상자가 카드를 찍으면 나는 소리인 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엊그제 남편과 어딜 다녀오는 길이었다.

남편은 시각장애인이기에 동반자까지 무료승차 대상이어서 남편이 카드를 찍고 우리 둘 다 개찰구를 통과해도 예전처럼 '삐빅' 소리만 들린다.

그전엔 일반 승차 카드는 '삑'하는 신호음이었고, 그 외 무료 승차 대상자와 미성년자 카드는 '삐빅' 소리로 부정승차자를 가려내곤 했었다.

사람들이 붐비는 시간대에 개찰구에서 반복적으로 들리는 '삑'과 '삐빅'이 이리저리 뒤섞여 부정수급자를 가려내기 힘들어 만든 조치였을까?

하필 65세 이상 노인 대상에게만 그런 소리가 나게 한 특별한 이유는 뭘까?

처음엔 나조차도 소리가 나는 쪽을 자연스레 쳐다보게 되었으니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이 65세 이상 된 무료승차자라는 사실이 너무도 원색적으로 알려지는 것 같아 민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뜩이나 지하철공사가 매년 천문학적인 적자로 골머리를 앓는다 하니 사람들은 노인 무료 승차를 없애야 한다, 또는 나이를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오가는 상황인데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그러한 메시지가 계속되면 내가 다른 이들에게 짐을 지우는 대상이 된다는 자괴감이 느껴지지는 않을까?

그 나이를 넘긴 지 오래된 사람들이야 무감할 수도 있지만 이제 막 그 대상자가 된 이들이 느낄 이상한 감정을 생각하자니 어쩌면 자발적인 유료승차자로 돌아서도록 하는 꼼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행복하세요'하는 소리가 '공짜 손님', ' 나이 든 사람'이라고 바꿔 들릴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대안이 있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 또한 실무를 맡아 그 일을 해 본 사람이 아니기에 그들만의 고충과 그에 따른 문제 해결 방법 또는 그들의 의도를 잘 알지는 못하니 뭐라 할 말은 딱히 없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결국 '행복하다'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우선 사전적 의미의 행복에 대해 살펴보자면....

'행복(幸福)'(명사)

1. 복된 좋은 운수, 2.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

(유의어: 기쁨, 다복, 복)


'하다'(동사)

1. 사람이나 동물, 물체 따위가 행동이나 작용을 이루다.

2. 먹을 것, 입을 것, 땔감 따위를 만들거나 장만하다.


'하다'는 동사이기는 하나 단독으로는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기에 앞의 말에 행위나 상태가 될 수 있도록 돕는 '보조동사'의 성격을 띤다.

일상적으로 '하다'라는 말은 '하지 않다', '하지 못하다'라는 뜻과는 다르게 긍정적인 상황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데 앞에 긍정적 명사 '행복'을 붙여 쓰니 어쨌든 긍정적 표현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다'가 동사적 표현이기에 그러한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주체자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그 결과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사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는가?

나의 피나는 노력과 그에 상응하는 결괏값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 양과 질적 변수, 최악은 전혀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때도 숱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주체자의 동력이 생각 외로 많이 소모되는 능동의 상태에서 조금 더 수월한 수동적인 '행복하다'의 기준점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각자의 긍정적인 생각 회로가 필요하다.

굳이 내 인생에 획기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혹은 기똥차게 운수 좋은 일이 생기지 않더라도 별일 없는 일상을 살며 현재의 안녕이 유지되는 것, 그것을 '행복'의 기준점으로 삼으면 애써 행복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록 내가 가난하고, 장애가 있고, 나이가 들었어도 내 일상과 주변에서 더 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고, 건강하게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물론 '행복'이라는 감정 회로만 돌리다 보면 문제 인식을 할 수 없고, 발전이 없다는 비판을 받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이 그토록 긍정적이기만 하고 일차원적이지만은 않으니 때로는 이러한 단순함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대 사회는 발달된 sns와 미디어 정보 등으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을 더 잘 느끼고 만족감을 느끼기 쉽지 않은 시대이다 보니 어쩌면 러한 긍정 회로의 힘이 더욱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행복'의 상태가 지극히 주관적면서 다분히 객관적이기도 하니  단어 하나가 주는 의미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의적인 뜻을 가졌구나 싶다.  

나 또한 누가 행복하시냐고 묻는다면 하루에 여러 번 오가는 감정과 상황에 따라 또는 그 비교 대상에 따라 그 대답이 바뀌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려다 '행복하세요'라는 말에 꽂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니 끝 간 데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고 나중에는 이 피곤한 생각을 왜 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그냥 누워서 유튜브나 보면서 웃기로 했다.

긴박감과 긴장감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며 유튜브를 들여다보며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상.....

이게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지하철공사에서 시행하는 '행복하세요' 프로젝트는 대상자들의 반발을 사지 않고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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